♧...참한詩

연애 외 1편 / 오탁번

김욱진 2020. 10. 20. 21:37

연애

오탁번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디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 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난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고 예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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