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幻이라는 갑
어느새 환갑,
저 갑 속에는 무수히 많은 창과 방패가 숨어 있다
가까스로 예까지 와 닿은 모순 같은 것
강산이 여섯 번 바뀌고도 남은 나의 흔적 같은 것
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허리춤까지 통깁스한 여섯 살배기 외아들 내민 창을 등에 업고
부산 대청동 산꼭대기 달동네 가파른 계단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삼 년을 하루같이 병 수발한 어머니는 방패가 되셨다
아버지 일찍 여읜 열다섯 소년의 복받친 서러움도
병아리 같은 자식 남매 두고 암 선고받은 쉰의 그늘도
더부살이하는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진 나의 창과 방패
산 넘고 물 건너 돌고 돌아온 갑의 나를 명줄처럼 붙들고
나는 다시 갑 속으로 들어가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창이 방패가 되고 방패가 창이 되는 순간
갑도 을도 아닌 나는 병이었다
나의 귓속엔 귀뚜리 소리가 들렸고
눈앞엔 난생처음 보는 버러지가 가물거렸다
그토록 살갑던 살냄새도 무덤덤해지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나마저
여태 피워댄 담배 연기만큼이나
꼴깍, 나를 잊어버리는 환각 속으로 빠뜨렸다
가끔은 치근덕거리는 나가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꼴값 꼴갑 꼴각 꼴깍하며 돌아다닌 나를 주저앉힌
환이라는 갑
나 부주하고 되돌아갈 때
저 갑 속에 든 나는 창일까 방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