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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글쎄

암, 글쎄 비슬산 오르다 우연히 암을 발견했다 등허리 쿡쿡 쑤신 그날 찍은 스냅사진 꼼꼼히 판독해 보니 곳곳에 화강암이다 암 중에서 제일 흔한 암 치밀어 오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암덩어리들이 몰래 계곡에 모여앉아 계추를 한다 그래서 암계 아니 암괴라 했던가 아니아니 안개처럼 스멀스멀 기어 내려오다 올망졸망 굳어진 암의 전이를 한눈에 다 보는 듯 불화살을 맞은 듯 온몸에 검은 세포가 점점이 박혀있다 얼굴색이 희읍스름하다 암 진단서처럼 빼곡 적혀있는 팻말엔 분명 비슬산 ‘암괴류-돌 너덜겅’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돌강과 애추라는 암 투병 중인 내게로 처방전이 전송되었다 화를 내면 낼수록 암 세포는 더 잘 번진다는… 암, 글쎄 -시인 뉴스 포엠 2020.11

♧...발표작 2021.03.10

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문如是我聞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주병률의 문학 TV(2020.9.29.) -2020 대구문학 12월호

♧...발표작 2021.03.10

눈사람 / 변희수

눈사람 변희수 녹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너는 얼음을 가졌고 나는 심장을 가졌다고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저 개는 살아있다고 영혼에는 색깔이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그만 둔 말이 하얗게 쌓이고 쌓여서 우리의 입을 틀어막아버릴 때 드디어 한 뭉치 흰눈이 될 때 쌓이고 쌓인 말들은 어디로 던져야 하나요 처음 말문이 터진 사람처럼 펄펄펄 눈은 내리고 펄펄펄 끓어 넘치는 것이 있어서 나는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말을 던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돌팔매를 던져도 피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퍽퍽, 차디찬 가슴에 박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불가능한 것을 물어보려다가 차가워졌지만 나는 잘 녹지 않으니까 어쩐지 고약한 사람 같고 희고 성스러워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눈이..

♧...참한詩 2021.03.03

옥수수가 익어갑니다 / 변희수

옥수수가 익어갑니다 변희수 내가 여름을 다 말해버리면 옥수수는 익지 않는다 촘촘한 치아가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매미 울음이 어금니에 박혀 빠지지 않는다 뭉개어지고 으깨어지는 말들 입속이 붐비면 처진 어깨를 조금 흔들어 보이거나 으쓱거려본다 치아와 치아 사이에 거웃처럼 비밀이 자란다 혀를 길게 빼문 한낮의 발설에 귀를 기울이던 바람이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린다 태양의 내란과 음모를 기억하던 여름이 벌어진 입을 조금씩 다문다 단전을 끌어올려 이빨 사이로 스,스,스 날숨을 뱉어본다 독 오른 뱀이 산으로 올라가고 당신이 잘 볶은 옥수수차를 말없이 내놓던 일 근자에, 더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옥수수는 이미 무량무량 익었습니다 ⸻계간 《문파》 2020년 겨울호

♧...참한詩 2021.03.03

자화상 / 이진흥

자화상 이진흥 거울 속에서 한 사내가 나를 본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를 알 듯도 하고 모를 것도 같다 투명한 유리의 차단 저켠에 서서 언제나 나를 바라보지만 그의 시선은 늘 무관심하다 나는 가끔 그에게 말을 건네거나 웃음을 보내다가 멋쩍어지는 수가 있다 내가 돌아설 때엔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를 슬쩍 엿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거울 앞에서 만나는 아주 가깝고도 머언 얼굴 나는 그를 누구라고 부르나 어느 때는 그는 우울하게 어느 때는 쾌활하게 보이지만 그건 믿을 수 없는 내 시선의 조작이리라 거울 면의 차단 저켠에서 말없이 그가 나를 응시하지만 나는 그를 거절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데 은근히 나를 구속하는 것일까 거울 속의 그 사내는. (2020 물빛 연간집)

♧...참한詩 2021.03.01

나의 아름다운 오실지 / 장하빈

나의 아름다운 오실지 장하빈 저물녘 동구 밖 산책하다가 길 잘못 들어 어느 골짜기에서 너를 만났네 물동이 같고 독항아리 같은 너 행여나 수줍은 아낙이 옷고름 물고 나타날 것만 같아 해거름이면 바람이 나서 너에게로 종종걸음 놓았네 개망초꽃으로 흔들리며 살포시 다가가거나 강아지풀로 꼬리 치며 언저리를 맴돌았네 네 볼우물처럼 파인 모래톱에 발자국 새기거나 네 무릎인 양 못가 바윗돌에 걸터앉기도 했네 까치노을 물들인 네 불그레한 낯바닥을 나는 물잠자리와 소금쟁이마냥 떠다녔네 어제는 산돌림으로, 오늘은 여우비로, 내일은 모다깃비로 잔잔한 네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네 투둑투둑, 한여름이 타개지면서 난 어느새 너에게 빠져들고 말았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꿈속까지 물이 차오를까 봐 너는 높다란 다락방에 깃들고 싶..

♧...참한詩 2021.02.28

발씻기 숙제 / 한상순

발씻기 숙제 한상순 가을걷이 끝난 뒤 허리병이 도져 병원에 입원한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발을 엄마가 닦아 드립니다 콩 한 가마니 불끈 들어올릴 때 단단한 버팀목이었을 장딴지가 마른 삭정이 같습니다 바람 불면 쇄쇄 소리가 날 것 같은 마른 삭정이에서 뻗어 내린 잔가지 같은 외할아버지의 발 엄마는 조심조심 외할아버지의 발을 닦습니다 가끔 학교에서 내 주는 부모님 발 씻겨 드리기 숙제, 엄마는 어렸을 때 미뤄 둔 그 숙제를 이제 하나 봅니다

♧...참한詩 2021.02.28

가정방문 가듯 우리집에 가다 / 류지남

가정방문 가듯 우리집에 가다 류지남(1961~2021) 갑작스레 기온이 뚝 떨어진 퇴근길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내 집 대신 일흔 아홉 어머니 혼자 지키고 계신 어릴 적 우리 집으로 갔네 소주 한 병 참치 깡통 하나, 그리고 울 엄니 좋아하는 크라운 웨하스와 함께 허우적허우적 고갯길 넘어 캄캄한 방문 앞에 서서 계슈~ 계슈~ 하고 바보같이 불렀더니만 드르륵 쾅 방문이 열리며... 아, 아직도 굳건한 울 엄니 야 이눔아 에미헌티 계슈가 뭐여 그리구 어째 늬 집으로 안 가고 여기루 왔냐 허둥허둥 늦은 밥상에 마주 앉아 노래 좋아하는 울 엄니 노래 소리 들으며 엄니 반 잔 나 한 잔 눈물처럼 단 술 나누었네 늙은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 하나 매달린 날 가정방문 가듯 나 우리집으로 간 날

♧...참한詩 2021.02.28

그릇 / 안도현

그릇 안도현 ​ 1 사기그릇 같은데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 ​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 버릴 수 없는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참한詩 202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