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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여 깨어나라 / 신천희

낙동강이여 깨어나라 신천희 낙동강은 지금 묵언 중이다 골골에서 재잘거리며 모여든 개울물들이 웅성거리다가 모두 입을 닫아걸었다 이제 무명의 허상들 모두 침잠시켜버리고 고요히 무애자재한 강물로 자정하며 홀로 맑아져야 한다 찰나의 걸림도 없는 반야의 물살로 흐르며 녹조를 만나면 녹조를 죽이고 와류를 만나면 와류를 죽이고 피안의 바다에서 오도송을 읊으며 법희의 춤사위를 펼치기 위해 밤낮없이 수행 중인 낙동강은 지금 묵언 중이다

♧...참한詩 2021.08.03

저녁의 퇴고 / 길상호

저녁의 퇴고 길상호 앉은뱅이 밥상을 펴고 시 한 편 다듬는 저녁, 햇살이 길게 목을 빼고 와 겸상으로 앉는다 젓가락도 없이 시 한 줄을 쭈욱, 뽑아들더니 허겁지겁 씹기 시작한다 너무 딱딱한 단어 몇 개 가시처럼 발라내놓고 익지 않은 수사들은 퉤퉤 뱉어내놓고, 넘길 게 하나 없었는지 잇자국 가득한 언어들 수북이 밥상 위에 쌓인다 노을보다 더 벌게져서 얼른 창을 닫고 돌아오니 시는 시대로 나는 나대로 발목을 잃은 앉은뱅이, 먹을수록 허기진 밥상은 잠시 물려놓기로 한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천상병詩문학상 수상...

♧...참한詩 2021.07.22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 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참한詩 2021.07.04

밥그릇 / 조향순

밥그릇 조향순 바깥에 사는 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우느라 나는 늘 바쁩니다 아침 먹으로 왔는데 밥그릇이 비었잖아 실컷 놀고 출출한데 밥그릇이 비었잖아 밤참 먹으로 왔더니 밥그릇이 비었잖아 이럴까봐 아침에도 낮에도 밤중에도 밥그릇을 채웁니다 빈 밥그릇 앞에서 떨어뜨릴 꽃씨 같은 작은 눈물, 생각만 해도 아! 빈 밥그릇 앞에서 떨어지는 세상의 모든 눈물, 생각만 해도 아!아!

♧...참한詩 2021.06.30

토끼 이야기 / 조은길

토끼 이야기 조은길 우리에 감금된 채 털을 빼앗기고 온몸을 난자당해 죽은 짐승이 있다 피비린내 앙등하는 주검위로 불덩이 같은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천년이 흘렀다 살아서 우리를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천년을 하루같이 귀를 쫑긋 열어놓고 빨갛게 뜬 눈으로 지새우게 한다 동을 바짝 웅크리고 낮고 연한 풀잎만을 고집해서 먹는것은 밀림의 시절 검은 독수리를 피하려다 붙은 어쩔수 없는 습관이겠지만 그것이 살결을 연하고 향기롭게 하고 털을 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되고 말았다 천년동안 수많은 신이 그들의 우리를 다녀갔지만 그들에게 등을 쪽 펴라든가 낮고 연한 풀잎을 먹지 말라든가 우리는 빠져나가는 기술을 귀띔해 주지는 않았다

♧...참한詩 2021.06.26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참한詩 2021.06.19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

♧...참한詩 2021.06.18

반대말 / 김소연

반대말 김소연 ​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 우..

♧...참한詩 2021.06.14

경운기 소리 / 문인수

경운기 소리 문인수 그 집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할아버지, 점심 때 집에 왔으나 할머니가 아직 오지 않아 대강 챙겨 자시고 다시 부지런히 경운기 몰고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아랫마을 갔다가 부랴부랴 집에 와 보니 에고, 이 양반, 맹물에 밥 말아 그냥 밥 떠 넣고 장 떠 넣고 한 눈치. 할머니 못내 속이 상해서 쯧, 쯧, 평소처럼 일거들 요량으로 한참 걸어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와락 달려들어 영감! 영감님을 부여안아 일으켰으나 119구급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어 묻은 흙 묻은 손.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 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 장면, 별사가 따로 있다. 무쇠 팔 경운기..

♧...참한詩 202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