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32

소리의 전령 / 이진엽

소리의 전령 이진엽-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얇은 막(幕)이 있는 것인가 여름, 그것이 끝나가는 길목이 그러하다 무엇인가 작은 드릴로 구멍을 뚫는 듯한 소리 똘똘똘 똘똘똘 그 소리에 투명한 막이 찢어지고 한 계절이 바뀌는 소식이 개울물처럼 밀려든다 조그만 미물 하나가 가녀린 촉수로 시간의 벽을 뚫고 맨 먼저 우주의 섭리를 이끌고 오는 저 소리 천지는 무심한 침묵 중에서도 이렇듯 어김없이 소리의 전령을 보내며 세계의 귀 먹은 밤을 열어 준다 귀뚜라미, 그 소리로

♧...참한詩 2023.02.17

노래의 눈썹 / 장옥관

노래의 눈썹 장옥관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간 새의 자취 좇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참한詩 2023.01.28

리허설 / 변희수

리허설 변희수 곧 가 너는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고 지금, 어디야 나는 태곳적부터 묻고 있는 사람 지금은 사거리를 지나고 있고 푸른 신호를 기다리고 있고 너는 어디든 지금과 함께 있으니까 곧 도착할 거라고 지금이 머물 처소에 대해서 말한다 지금이라면 충분한데 부재중입니다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과오로 지금이 돌아온다면 처음 뵙겠습니다만 잘 부탁합니다 그런 인사를 나누려고 지금껏 기다려 왔습니다 재연만이 유일한 장소인 것처럼 말했다

♧...참한詩 2023.01.23

기도 / 최영철

기도 최영철 ​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나 조는 사이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 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 시집 문지. 2010

♧...참한詩 2022.12.30

실참구시의 시론(가혹한 향기 / 이진흥)

실참구시의 시론 이진흥 선생님의 시는 어디서 왔는가 ⇒불교적 사유에 기인한다. 시(P.80) : 화두-영원한 질문이다 1) 공空 사상 부질없다(P.24), 없다(P.86), 그 나무(P.87), 문득 떨어지는 낙엽 하나가 (p.94) : (무상)무아 들리는 소리(P.89) : 환생 어둠(P.96) : 일체의 근원적인 것-빛, 사랑⇒한 찰나 아침 이별(P.38) : 세상의 모든 것은 일회적인 것-일기일회(一期一會)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없음’이 ‘있음’의 발견, 이는 단순 명료하지만 웅숭깊다 : 신화 창조 2) 불이不二 : 나=자연=삶(일상) 꽃(P58), 나는 반딧불((P.91) :나=자연 금강산(P12), 무지개(P.13), 라일락1(P.16) :자연=여인 어떤 풍경(P.45) ..

♧...자료&꺼리 2022.11.01

죽음과 삶의 아름다움 / 팽영일

죽음과 삶의 아름다움 팽영일 얼마 전 추석 성묘를 다녀오며, ‘문득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한 장 찍어 보았다. 그런데 너무나 건강하게 살던 선배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 암을 극복하나 싶었던 고교 동기생의 죽음, 영국 및 영연방 시민들과 70년간 삶을 함께 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죽음을 비롯하여 도처에 흩어져 있는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또, 국회에서는 조력 존엄사법이 발의되어 있다는 소식 등을 보며, 죽음은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이상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현실 지향의 철학자로 알려진 크세노폰은 기원전 426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355년경 코린토스에서 죽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스승 ..

♧...자료&꺼리 2022.10.31

상화 고택

상화 고택 오랜만에 고향집 온 듯 푸근하다 상화 시비 앞에서 사진 한 장, 찰칵 타는 목마름으로* 마당가 우두커니 서있는 석류나무 물 한 바가지 부어주고 부엌 들어가 솥뚜껑도 열어보고 무슨 시제라도 한낱 받아갈까 싶어 부지깽이로 텅 빈 아궁이 속 타다 남은 재 긁적거리고 있던 참 나의 침실로 자꾸 들오라는 상화 형 * 김지하의 시제에서 빌려옴 -2022 중구를 노래하다 시화전

♧...발표작 2022.10.23

나는 땅 부자다 외 1편

나는 땅 부자다 아버지 살아생전 옆집 다랑논 서너 마지기 붙여먹고 살면서도 나는 땅 부자다, 땅 부자다 늘 그러셨는데 고 말씀 고대로 물려받았다 걷다, 문득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땅, 나는 땅의 아들 땅 부자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나 혼자 걷다 보면 그 땅은 온전히 나의 땅이 되고 만다 이런 날은 오두막 같은 찻집에 들어가 삼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땅 주인 노릇을 한다 여보시오, 이곳은 쓸 땅이 없는 거 같소 그러면, 동남아 종업원 아가씨 설탕 한 봉다리 들고 쫓아와 썰∼땅 쓸 땅 여기 있어요, 하면서 연신 고개를 숙인다 이 맛에 나는 쓸모없는 땅만 죽도록 밟고 다닌다 땅값이 얼마냐고 평수가 얼마나 되냐고 묻는 이 없어 참, 좋다 (시작노트) 아무도 가지 않은 듯한 길 한 모퉁이 조용한 찻..

♧...발표작 2022.10.23

바이러스 / 조영심

바이러스 조영심 산 사람만 걸리겠나 숨구멍을 여닫고 살아야 하는 목숨들 네발짐승 날개 달린 것들도 걸려서 소도 돼지도 닭도 오리도 그것도 떼로 걸리면 오고 가는 문을 닫아걸고 산 채로 묻어 버리지 않던가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나무도 풀도 걸린다 나무가 떼죽음을 당하고 곡식이 부스러지듯 쓰러지고 꽃이 피다가 누렇게 뜬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서서히 쪼그라져 끝내 숨이 밭아 버린다 서로 씨를 말릴 수도 있지 서로 씨가 마를 수도 있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서로의 줄에 매달려 있는 것들 하나를 끌면 모두가 끌려오는 인드라망 이 목숨줄 그 주인은 누구인가

♧...참한詩 2022.10.20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참한詩 2022.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