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숟가락의 날들 /김형로

김욱진 2023. 4. 1. 22:11

숟가락의 날들

김형로

 

 

아이 다 키웠는데

숟가락 들고 먹여주는 일 또 있다

 

이소離巢 중 다친 딱새에게 달걀노른자를 으깨 먹였다

부러진 날개를 늘어뜨리고

새벽에 짹! 하고 어미 부르는 소리

손아귀에 쥐고 숟가락으로 떠먹였다

 

오늘은 할미꽃 새싹에게 뜨물을 먹였다

싹 틔운 상토에 얼마큼 먹을 게 있겠나 싶어

두 떡잎으로 서있는

어린것에게 뜨물을 차 숟가락으로 먹였다

 

신기하게도 숟가락 쥐고 

떠먹이면

나는 고요해지고 낮아진다

옴팍하니 작은 것이 영물스럽다

 

나는 오늘도 숟가락으로

내 몸에게 떠먹인다

먹는 게 아니라 떠먹인다 생각하면

내 몸이 측은해진다

 

떠먹이는 숟가락에게

입을 벌리고 쓰윽, 숟가락을 훑는

입술이며 혀가 고맙다

 

모오든 쇠붙이는 가더라도*

이 야무진 것은 남아야 한다

요망진 숟가락의 신비다

 

*신동엽의 시 변용

 

(2023 사람의 문학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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