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30

무료급식소

무료급식소 김욱진 수성못 둑을 돌다 보면 둑 가에 죽 둘러서서 새우깡을 새우처럼 방생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눈치코치 없는 꼬맹이 물고기들도 다 안다 온종일 북적이는 무료급식소 새우깡 몇 물속으로 던져주면 금세 새우들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어디선가 그 냄새 맡고 몰려온 물고기들은 새우 한 마리 먼저 낚아채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개중엔 동네 건달 행세하며 떼 지어 몰려다니는 패거리족도 있고 새끼 입에 들어가는 새우 꼬리 깡 물고 뜯어먹는 얌체족도 있지만 그래도 부지기수는 자식새끼 먹여 살릴 땟거리 구하려고 한평생 헤엄치며 돌아다닌 나 많은 물고기들 물 한 모금으로 아침 때우고 오늘은 어딜 가서 밥값을 하나 허구한 날 고민했을 이상화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귀동냥만..

♧...발표작 2023.11.03

숯을 굽다 / 사윤수

숯을 굽다 사윤수 ​ ​ 베어낸 굴참나무를 수레에 실어왔다 둥치가 튼실한 걸 보니 하늘을 이고 자랐겠구나 우듬지에 따라온 두 평 반 구름이 높이 떠가고 가지마다 앉았던 새소리가 흩어졌다 ​ 참나무는 빈 몸이 되었다 세월을 자르고 바람을 토막 내고 잔가지와 잎은 불쏘시개로 쓸 테니 버릴 것이 없다 궁핍도 때로는 쓸모 있는 시절인 것을, 너를 구워 나를 익게 하리라 ​ 숯가마를 가득 채운 직립의 참나무에 불을 지핀다 세월이 타고 고뇌가 타고 나무의 기억들이 춤춘다 이레 여드레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나무는 죽고 또 죽어야 숯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므로 나는 오로지 맑고 희거나 검게 빛나는 덩이를 얻고자 했으므로 ​ 한 때 숯을 굽는 일은 나의 실학이 되었다 숯이 된 굴참나무는 탈 때 연기가 나지 않고 오..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 - 순암을 읽다 / 김은숙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순암을 읽다 ​김은숙 ​ 세상은 늘 원본이자 진본이라서 훗날이 반드시 고증해 온다 ​ 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길이라서 정사(政事)를 버리고 정사(正史)만을 저록한다 ​ 사람의 심연을 다스리는 성현의 도는 저택과 같다 공리공론에 빠지지 않으려 선입견 버리고 붓을 드는 순간 갓을 고쳐 쓴 아집은 돌담 밖에서도 기웃거리지 못한다 ​ 실체가 끊어지면 정처 없이 걷고 실체가 보이면 한 달 내내 서고에 틀어박혀 혜안을 넓힌다 ​ 스무 권을 완성하는 동안 벼루는 움푹 패고 열 번째로 닳은 붓이 편년을 헤아린다 ​ 그러니 역사를 쓴 것은 내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집필한 것이다 ​ 잠시 흩어진 중심을 하나로 모아 머리말을 적지 않고 퇴고로 쓴 시간만큼 거슬러간다 ​ 밖을 보니 문득 새벽이..

한두레 마을 염소 이야기

한두레 마을 염소 이야기 김욱진 초등학교 때 나는 염소 동아리 반장을 한 적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로 장학생인 셈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나는 장학금 턱으로 어린 암염소 한 마리를 받았다 소 키우는 집이 엄청 부러웠던 그 시절 학교만 갔다 오면 나는 염소 고삐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염소가 자라 이듬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 수놈은 팔아 중학교 입학금 마련하고 암놈은 건넛집 할머니랑 사는 여자아이에게 분양했다 희망 사다리 오른 그 아이도 어미 염소 되도록 길러 새끼 낳으면 릴레이식으로 건네주는 염소 동아리 염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 낳고 낳아 육십여 호 되는 한두레 마을은 어느새 염소 한 마리 없는 집이 없었다 뿔 맞대고 티격태격하던 이웃들 염소 교배시..

♧...발표작 2023.10.25

노숙 / 김사인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참한詩 2023.09.30

연희문학창작촌 / 장석남

연희문학창작촌 장석남 내가 든 방에는 두어 뼘 北窓이 있어서 겨울 바라보기가 수월하겠구나 하였다 늙은 소나무들 열 짓지 않고 들쑥날쑥 섰는데 모든 푸른 빛을 나누어 나의 큰 앞창문 물들여 주었다 젊은 작가 하나와 비탈에서 마주쳐 버들잎 같은 웃음 보아 좋았는데 들어와 거울 앞에 서 보니 옷을 뒤집어 입었군 김치 깎두기에 밥통 밥을 다 퍼먹고 지난 달력을 뜯어내어 뒷면에 시를 적는다 돌부리에 부딪혀 까맣게 죽은 왼쪽 엄지 발가락에 대하여, 또 그 발톱 속에 뛰노는 은빛 물고기떼에 대하여 시를 적는다 목련은 보고 나가시려나? 한 시인은 이런 말을 했었다 一說에 의하면 여기 목련은 一千 乃至 二千 年에 한 번씩 솟는다지 北窓 아래 앉았으나 바뀐 주소에 의하면 千겹 목련 메아리의 쉰 번째 골짜기 새로 난 발톱을..

♧...참한詩 2023.09.29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 고명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 개와 눈과 아이는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전히 날뛰는 힘을 갖고 싶어서 눈 녹인 물을 내 안에 넣고 싶었다 차갑고 뻑뻑한 팔을 주무르면서 떠난 개들의 눈 쌓인 그릇을 치울 수 있다면 ​ 소의 농포를 환부에 쓸쩍 바르고 키스하고 이민자와 손을 잡고 감자에 뿔이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설편처럼 사랑해 사랑해 속삭인다면 ​ 모든 목줄이 훌라후프로 커다래지겠지 죽은 개들이 혀를 빼물고 냇물이 달리고 쫑끗쫑끗 산맥이 서서 목덜미 터지고 흙속에서 더덕이 다리를 뻗을 때 네 어둠 속의 육상을 보고 있다 짓무른 뒷목에 손을 얹은 채 차가운 감자를 갈아서 눈처럼 바른다 네 캄캄한 방문에 입을 맞춘다 ​ 그리고 나는, 함부로 더 이상해져야지 꽃술을 만지던 손끝으로 배꼽을 파..

♧...참한詩 2023.09.12

나무로 살기 / 김윤현

나무로 살기 김윤현 음지 양지 따라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기 가지와 잎이 다르게 생겼다고 남을 내치지 않기 주어 없는 문장처럼 가볍게 호흡하기 매일 매일의 변화를 눈에 띄지 않게 이어가기 바람이 불면 때를 놓치지 않고 스트레칭하기 구름이 다가오면 지나갈 때까지 모른척하기 아무리 알아주는 이 없어도 뿌리는 드러내지 않기 어떤 일이 있어도 푸르름은 유지하기

♧...참한詩 2023.09.10

정직한 사람 / 나희덕

정직한 사람 ​ ​나희덕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피가 묵처럼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매일 다른 얼굴이 주어지는 아침, 오늘의 얼굴은 어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거짓말은 굳어갈수록 독기를 잃은 뱀의 말에 가까워진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거짓말과 비밀의 차이도 알고 있다 깊은 슬픔이 어떻게 거짓말 없이 전달될 수 있을까 연민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이 낫고 말의 순도보다는 말의 두께가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독기를 잃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도 있으니 누구도 그것을 거짓말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확정된 진실조차 없기에 정직함이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정직함에 대한 부정직한 이해만이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낼 뿐 ..

♧...참한詩 2023.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