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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연 / 김욱진

묘연김욱진 엄니 살던 흙집에 갈 때마다고양이 먹을거리 주섬주섬 챙겨간다어떤 날은 식구들 발라먹은 생선 가시 조심스레 가져가애간장 녹이듯 나눠주고어쩌다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켜먹은 날은바삭거리는 껍데기 날개뼈 오도독뼈에다고소한 냄새까지 듬뿍 담아가엄청 큰 보시하듯 훅 던져주면녀석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한 동가리씩 오도독오도독 씹어재끼고는땅바닥 뒹굴다가 히죽히죽 웃다가 날 보고 꾸벅!것도 재롱이라고 다음날은아침상에 오른 프라이한 계란 노른자 집사람 몰래 숨겨가노랑나비 날갯짓하듯 한 조각씩 나풀나풀 날려주고그래서인지,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동네 고양이들이 텅 빈 집으로 우르르 몰려와젖먹이 녀석들은 대놓고 야옹, 야옹 졸라대고나먹은 녀석들은 내 눈치 살살 보며 입맛 쫄쫄 다신다먹이에 길들여진 고양이들어느새 나만..

♧...발표작 2024.05.18

선사의 설법 / 한용운

선사의 설법 한용운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참한詩 2024.04.18

벚꽃 법문

벚꽃 법문 김욱진 봄은 봄이로다. 그 한 마디에 확철대오한 벚나무 한 소식 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각처 운수납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주 불국사 동안거 한 철 나고 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무수히 스쳐지나간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도반 삼아 벗 삼아, 나 무의 눈을 뜨고 꽃 활짝 피웠다 여기, 지금, 나는 꽃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머물되 머문 바 없이 머물고 있는 나 무로 왔다 무로 돌아가는 벗, 아니 벚 꽃이여, 나무여 누가 단박에, 나 무의 봄을 봄 아닌 봄으로 읽고 가려나, 앗!

♧...발표작 2024.04.07

그늘

그늘 김욱진 등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 두 분 마주보고 앉아 주고받는 얘기 등 너머로 엿듣는다 지난 번 디스큰가 뭔가 튀어나왔다더니 수술은 했어? 아니, 가끔 다리 좀 저려도 그냥 등 굽히고 살기로 마음먹었어 드나나나 등 굽히고 꾸벅꾸벅 절하며 지내보니 아들 딸 며느리도 좋아하고 손주 녀석들까지 다 좋아하던데, 뭘 등 꼬장꼬장 세우고 살 때보다 용돈받기도 영 수월하고, 하여튼 그래 그늘 드리워진 등 한쪽, 써늘하다

♧...발표작 2024.04.01

시인의 재산 외 21편 /최서림

시인의 재산 최서림 ​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하늘은 내 것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새털구름도 내 것이다. 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내 것이다. 너무 높아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새도 듣고 바람도 듣고 ​ 천산남로 어떤 종족은 아직도, 땅이나 집을 사고팔 때 문서를 주고받지 않는다. 도장 찍고 카피하고 공증을 받은 문서보다 사람들 사이 약속을 더 믿는다. 돌궐족이 내뱉는 말은 하늘도 듣고 땅도 듣고 새도 듣는다. 낙타풀도 지나가는 바람도 다 듣고 있다. 글자는 종이 위에 적히지만 말은 영혼 속에 깊숙이 새겨진다. 바위에다 매달아 수장시켜버릴 수도 불에다 태워 죽일 수도 없는 말. ​ 세상의 안이면서 밖인 ​ 나의 고향집, 엄마의 몸은 이 세상..

♧...참한詩 2024.01.27

도동측백나무 숲

도동측백나무 숲 속 어지간히 썩었을 거 같다 수백 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자수성가한 도동측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1호라는 칭호마저 잃어버렸다니 어쩌겠나, 국보 1호 숭례문도 보물 1호 흥인지문도 다 그렇게 되고 말았는 걸 그나저나, 숫자에 불과한 호칭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도동 주인 노릇하고 살아온 측백나무 틈새로 말채나무 쇠물푸레나무 자귀나무 소태나무 층층나무 회화나무 골담초나무 난티나무…… 도통 듣도 보도 못한 타성바지 나무들이 천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와 우후죽순처럼 자라고 있다는 후문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듯 누군가 잘 되는 꼴 보면 그저 시샘하고 헐뜯는 우리네 세상 어디, 나무들이라고 별반 다르랴 (2023 천연기념물 1호)

♧...발표작 202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