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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법문

벚꽃 법문 김욱진 봄은 봄이로다. 그 한 마디에 확철대오한 벚나무 한 소식 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각처 운수납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주 불국사 동안거 한 철 나고 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무수히 스쳐지나간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도반 삼아 벗 삼아, 나 무의 눈을 뜨고 꽃 활짝 피웠다 여기, 지금, 나는 꽃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머물되 머문 바 없이 머물고 있는 나 무로 왔다 무로 돌아가는 벗, 아니 벚 꽃이여, 나무여 누가 단박에, 나 무의 봄을 봄 아닌 봄으로 읽고 가려나, 앗!

♧...발표작 2024.04.07

그늘

그늘 김욱진 등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 두 분 마주보고 앉아 주고받는 얘기 등 너머로 엿듣는다 지난 번 디스큰가 뭔가 튀어나왔다더니 수술은 했어? 아니, 가끔 다리 좀 저려도 그냥 등 굽히고 살기로 마음먹었어 드나나나 등 굽히고 꾸벅꾸벅 절하며 지내보니 아들 딸 며느리도 좋아하고 손주 녀석들까지 다 좋아하던데, 뭘 등 꼬장꼬장 세우고 살 때보다 용돈받기도 영 수월하고, 하여튼 그래 그늘 드리워진 등 한쪽, 써늘하다

♧...발표작 2024.04.01

시인의 재산 외 21편 /최서림

시인의 재산 최서림 ​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하늘은 내 것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새털구름도 내 것이다. 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내 것이다. 너무 높아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새도 듣고 바람도 듣고 ​ 천산남로 어떤 종족은 아직도, 땅이나 집을 사고팔 때 문서를 주고받지 않는다. 도장 찍고 카피하고 공증을 받은 문서보다 사람들 사이 약속을 더 믿는다. 돌궐족이 내뱉는 말은 하늘도 듣고 땅도 듣고 새도 듣는다. 낙타풀도 지나가는 바람도 다 듣고 있다. 글자는 종이 위에 적히지만 말은 영혼 속에 깊숙이 새겨진다. 바위에다 매달아 수장시켜버릴 수도 불에다 태워 죽일 수도 없는 말. ​ 세상의 안이면서 밖인 ​ 나의 고향집, 엄마의 몸은 이 세상..

♧...참한詩 2024.01.27

도동측백나무 숲

도동측백나무 숲 속 어지간히 썩었을 거 같다 수백 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자수성가한 도동측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1호라는 칭호마저 잃어버렸다니 어쩌겠나, 국보 1호 숭례문도 보물 1호 흥인지문도 다 그렇게 되고 말았는 걸 그나저나, 숫자에 불과한 호칭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도동 주인 노릇하고 살아온 측백나무 틈새로 말채나무 쇠물푸레나무 자귀나무 소태나무 층층나무 회화나무 골담초나무 난티나무…… 도통 듣도 보도 못한 타성바지 나무들이 천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와 우후죽순처럼 자라고 있다는 후문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듯 누군가 잘 되는 꼴 보면 그저 시샘하고 헐뜯는 우리네 세상 어디, 나무들이라고 별반 다르랴 (2023 천연기념물 1호)

♧...발표작 2023.12.15

모래, 노래 / 문성해

모래, 노래 문성해 옛날의 노래는 모래였다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파고들었다네 누군가 와서 상한 깃털 같은 마음을 모래 속에 파묻고 가면 파도가 데려가 씻기고 씻기고 햇볕은 말리고 바다는 절여주고 갈매기는 품어주었다네 흰 알처럼 옛날의 노래는 하루종일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네 그 위에 뒹굴 수 있었다네 부드러운 요처럼 부서져 내린 노래는 스스로 마을로 흘러들어 부뚜막에도 뜨락에도 요대기 위에도 포슬포슬 기어들어 까슬까슬 눈동자 속을 파고들었다네 심장 속에도 붉게 박혔다네 어떤 노래는 아주 사적이라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퍼갈 수 없었다네

♧...참한詩 2023.11.05

고독이 거기서 / 이상국

고독이 거기서 이상국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바닷가에 '고독'이라는 까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인데 지날 때마다 마당에 차 한대 없는 걸 보면 고독이 정말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은 아주 오래된 친구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이나 밤을 맡겨놓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온몸을 간판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참한詩 2023.11.05

그 바람에

그 바람에 김욱진 은행들이 다 털렸다 졸지에 알거지 신세가 되어버린 은행들은 길바닥에 나앉았고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구린내가 났다 누구 소행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줄도산 당한 은행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바람에 은행 주가는 폭락했고 빚쟁이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짓뭉개듯 은행 짓밟고 지나갔고 바람은 그냥 빚잔치 한 판 속 시원하게 벌인 듯 지나갔다 그 바람에 빚진 늦가을 바람은 큰길가 신호등 언저리 보도블록 위 은행 신용불량자 딱지처럼 딱 붙어있는 일수대출 광고지 직빵 전화번호부터 슬그머니 떼어내고 있었다 (2022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작)

♧...발표작 2023.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