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길 / 강문숙 혼자 가는 길강문숙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거기 성급한 초저녁 별들 뛰어 내리다 마는지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 창을 여닫는지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 간다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혼자 가는 이 길,누가 어둠을 탁탁 치며 걸어 오는지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 당기는지 ♧...참한詩 2025.05.28
청동우물 / 강문숙 청동우물 강문숙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지나간다.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 지나가고농사꾼 방물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쪽진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관 전시실 안,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 것인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어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우물.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들어와 울음 섞인 노래를 풀.. ♧...참한詩 2025.05.28
겨울 정원 / 문태준 겨울 정원문태준 마른 넝쿨에 비 오네 목을 빠끔히 내놓으며비 오네 소한 낮전에무말랭이 같은 비 꼬부라진내게 오는 비는헐거워 벗겨지는데 마른 넝쿨은 비를 휘감아봄여름 땅벌레처럼 살이 오르네 ♧...참한詩 2025.05.17
나의 시답잖은 시론 나의 시답잖은 시론김욱진 오늘 참 먼 길을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68년이 걸렸네요. 제가 이 집까지 오게 된 것은 참으로 기적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이곳 강문숙 선생님과의 시절 인연이 여기, 지금, 나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귀하고 소중한 인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답잖은 시집 한 권이 因이었고 성주에 있는 선원 카페에 강물소리 몇몇 시인님들과 동행한 것이 緣이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이 인연의 줄이 이토록 끈끈하게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는 나는 분명 지금, 여기 있습니다. 여기 함께하신 선생님들 모두 나를 한번 찾아 보십시오. 여기, 지금, 나는 어디 있습니까? 저기 마당에 서있는 나무를 한번 보십시오. 제 말에 속지 말고 저 나무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자료&꺼리 2025.05.14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김욱진 고향 친구 딸내미 예식 가서주례 없는 혼례식을 보고 예식장 마당 벤치에 나와 앉아있다니전깃줄로 탱탱 묶인 노송 한 그루반짝반짝 불이 들어오자주례 말씀 한 마디 하신다서로 다른 누구랑 붙어산다는 것일촉즉발의 위기지요나는 늘 푸른 줄만 알았어요일 촉 전구쯤이야, 하고 살았는데그 일 촉들이 한꺼번에 번쩍벌떼처럼 달려들 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소그런 줄도 모르고야, 저 소나무 늘 짜릿하겠다비바람 몰아치고 어둠 찾아와도 저토록 뜨겁고 환상적인 밤또 어디 있겠냐고남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나무의 생 또한 저기, 저솔방울들처럼 붙어살다 가는 객일 뿐이오이 세상 늘 푸른 솔이 어디 있소 (시집『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2025 시인동네) ♧...발표작 2025.05.08
김욱진 5시집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2025, 시인동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siindn&logNo=223837324197&navType=by 시인동네 시인선 251, 김욱진 시집,『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사랑과 생명의 생성 원리 2003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김욱진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어느 노송의 주례...blog.naver.com ♧...기사 및 해설 2025.04.19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끌어모으면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참한詩 2025.04.15
얼굴 / 안상학 얼굴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 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그저 별 다른 얼굴 없다는 듯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참한詩 2025.04.15
돌로 모자를 눌러 놓다 / 유홍준 돌로 모자를 눌러 놓다유홍준 바람에 날아가려는 모자를 돌로 눌러놓았다 바람에 날아가려는 모자를 신발로 눌러놓았다 모자-얘는변심과 변덕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머리를 두둔하는 종자라아상과 아집과 교만으로 가득 찬 머리를 추종하는 종자라 꼼짝도 못하게 나는 신발로 모자를 눌러놓았다 ♧...참한詩 2025.04.15
바깥에 갇히다 / 정용화 바깥에 갇히다정용화 우리 집 현관 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 있는 30분 동안겨울이 왔다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어디 문 뿐이겠는가낡을대로 낡은 현수막이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나는 지금 바깥이다 ♧...참한詩 202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