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김욱진 2023. 7. 14. 21:43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1977년 “현대 시학”에 ‘비발디’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진흙소를 타고》《세속 도시의 즐거움》

《고해 문서》 《회저의 밤》《달맞이꽃에 대한 명상》《반딧불 보호구역》《북극 얼굴이 녹을 때》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 이산 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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