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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 - 순암을 읽다 / 김은숙

김욱진 2023. 10. 31. 11:15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순암을 읽다

​김은숙

 

세상은 늘 원본이자 진본이라서

훗날이 반드시 고증해 온다

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길이라서

정사(政事)를 버리고 정사(正史)만을 저록한다

사람의 심연을 다스리는 성현의 도는 저택과 같다

공리공론에 빠지지 않으려

선입견 버리고 붓을 드는 순간

갓을 고쳐 쓴 아집은

돌담 밖에서도 기웃거리지 못한다

실체가 끊어지면 정처 없이 걷고

실체가 보이면 한 달 내내 서고에 틀어박혀

혜안을 넓힌다

스무 권을 완성하는 동안

벼루는 움푹 패고

열 번째로 닳은 붓이 편년을 헤아린다

그러니 역사를 쓴 것은 내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집필한 것이다

잠시 흩어진 중심을 하나로 모아

머리말을 적지 않고

퇴고로 쓴 시간만큼 거슬러간다

밖을 보니 문득 새벽이다

미간을 명징하게 지켜보는 달이

부록처럼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