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수상작

김욱진 시인,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시 7편)

김욱진 2023. 6. 3. 10:51

AI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날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알려줘” 하면

전문적이면서도 캐주얼하게

간단명료하면서도 자신감 있고 친근하게

애교떨 듯 눈 몇 번 깜빡깜빡하면서

입맛대로 요리조리 맞춰주는 AI

대체 저 아이는 어느 세상에서 왔는지, 속도 없어

에이, 시발 것

시고 나발이고

이러다 저 아이 종노릇하다 가게 생겼네, 참 나  

 

 

대가족

 

엄니 살아생전

우리 집은 손이 귀하다고 늘 그러시며

고양이들만 찾아와도 손주 본 듯 반갑게

이밥에다 멸치 동가리 몇 얹어

봉당에 놓아두고 그러셨는데

엄니 떠난 그 집엔, 어느새

고양이 3대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주인 노릇하면서

간간이 돌아다니는 생쥐도 잡고

이 골목 저 골목 땟거리 구하러 다니다가도

큰 볼일 작은 볼일 볼 때면

우리 집 텃밭으로 쫓아와 엉덩이 넙죽 까발리고

거름 주듯 똥 누고 언저리 흙 긁어 덮고

물 주듯 오줌 누고, 그 기운에

고추는 주렁주렁

가지는 반들반들

방울토마토는 올망졸망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그러다가도 가끔 나만 찾아가면

고양이 여섯 마리

마당 한복판 오도카니 둘러앉아

입맛 쪽쪽 다신다

엄니 생각에

계란노른자 프라이해서 하나씩 던져주면

손주 녀석들은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우물우물 씹다 뱉어놓은 할미 것까지

싹싹 다 주워 먹는다

어미는 그게 못마땅했던지

눈 부릅뜨고 노려보다 고개 돌리고

할미는 먹은 둥 마는 둥

먼 산만 멍하니 바라보고

이 소문이 삽시간에 온 동네 좍 퍼졌다

허기진 길고양이들 하나 둘씩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새 고무신

 

어릴 적

가잿골 뒷도랑에서

가재 세 마리 잡아

새 고무신에 넣어뒀더니

가재들은 난생처음

고무신을 신고 더듬더듬

삼행시 짓기 놀이라도 하듯

고, 고개를 까딱까딱

무, 무릎은 오므렸다 폈다 그러면서

신, 신이 났다

똑바로 서서 걷는다는 게

한 녀석은 왼손 편으로 걷고

또 한 녀석은 오른손 편으로 걷고

또 다른 한 녀석은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뒤로 걸었다 그러기만 하고

나는 그냥 맨발로 삐딱삐딱

가재걸음 걸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겨 보니

그 녀석들 발가락에

물집이 몽실몽실 생겼다  

 

 

브레이크 타임

 

시래기 국밥집 앞 지나가다

문득 시래깃국 먹던 어린 시절 떠올라

고 생각 고대로 데리고

식당 문고리 잡아당겼더니 문이 잠겼다

브레이크 타임, 3시부터 5시까지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두 시간이면 무밭 다 갈아엎고도 남는 시간인데

그래, 올 가을 무도 똥값이고

시래깃국 장사해서 먹고 살기 힘든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그래도 밥 때 놓친 사람들 허기 채우긴 그저 그만인데

설마, 시래기가 쓰레기 되어버린 걸까

손님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 길바닥 버려진 무청 한 이파리 주워

너의 전생은 무, 내생은 시래기

그놈의 한 생 물고 늘어진 나는

무 한 입 베어 물고

시래기 되었다 무 되었다

한 시간 남짓 온갖 궁상떨면서

기다렸다, 나도 무도 아닌 나무의자에 앉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

무의 자를 만나고 있었다

시래기는 오간데 없고

무 사이로 또 한 생이 지나갔다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

국밥값 4000원 슬몃 훔쳐보는 노부부

브레이크 밟았다 뗐다 그러면서

줄을 섰다

뚝뚝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발이 하는 말

 

아, 어디쯤일까

길을 걷다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

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

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

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

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

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

써레질하는 소처럼

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

그래, 맞아

둘이 하나 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

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

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

여기, 지금, 나는

바닥 아닌 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발

바닥을 보았고

바닥 없는 바닥

아슬아슬 가닿은 발

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

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

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

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

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

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

발가락과 발뒤꿈치는 땀방울 밀고 당기며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고

어느 바닥인지 알 수 없는 그 바닥

간신히 가닿고 보니

바닥이라는 바닥 기운 다 끌어당기고 가는 저 발

바닥은 바다보다 깊고 넓적하다

 

 

자격증 시대

 

요즘 자격증 하나로는 왠지 불안하다

눈앞에 날파리가 날아다니고부터

나는 온종일 칭얼대는 그 녀석들 밥 먹이고

뒤치다꺼리하다 보면

하루해가 훌쩍 다 지나간다

그러다 밤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듯

곤히 잠들어버리는 녀석들

개중엔 오줌 마렵다고 깨서 보채는 녀석도 있고

엎치락뒤치락 잠꼬대하듯

밤새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다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젖먹이 달래듯 살살 달래다 보면

난데없이 귓속 어느 한 모퉁이서

매미들 요란하게 울어댄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맴맴 같이 따라 울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재우고

잠시 눈 붙이려고 누웠다 보면

저 멀리 귀뚜리소리도 들린다

밤낮이 이래 시끄러워서야, 우째 살겠노

철없이 울어대는 요 녀석들 죽 데리고

담날 아침 용타는 안이비인후과 찾아갔더니

비문증에다 이명증까지

노치원 자격증은 이게 기본이라 그러네, 참 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산낙지와 하룻밤 묵다

 

나 어릴 적

우등상 받아왔다고

아버지는 시오리 길 장에 가서

장작 한 짐 판 돈으로

산낙지 한 마리

지겟머리 걸머지고 오셨다

그날 저녁

그 녀석을 산 채로 듬성듬성 썰어

접시 위에다 올려놓으니

낙지 수 십 마리가 꼬물꼬물거렸다

난생처음 바다를 떠나온 낙지는

참, 어리둥절했겠다

바다에 사는 줄도 모르고 산

낙지는 정신없이 참, 기름장을 찍어먹었다

미끌미끌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멀미를 했다

낙지는 내 입안이 갯벌인 줄 알고

천장에 착 달라붙어 있다가

목구멍 속으로 차츰차츰 기어들어갔다

낯선 숙소에서

밤새 구불텅구불텅 온몸을 뒤척이다

새벽녘 나랑 곤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