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꽃
“대나무도 꽃이 핀다. 그러나 열대 지방의 대는 곧잘 꽃을 피우나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매우 보기 어렵다. 식물인 이상 꽃은 반드시 피우는데 언제 피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영양의 부족 때문이라든가 태양의 흑점에 관계가 있다고도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고, 일본에서는 대꽃이 피면 기근이 있다고도 하는데, 전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대나무에 꽃이 필 때는 대숲 전체가 뿌리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늙은 대나무도 어린 대나무도 일제히 피고 그 후는 전부 시들어 죽는다.”
― 동아일보, 1956년 10월 15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과 고령군 고령면 일대에 대나무꽃이 피어 주민들은 대나무 꽃이 피면 흉조라고 옛 미신을 믿고 있는 듯 화제를 모으고 있다. 경북도경은 12일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대나무는 영물인 봉황새가 나올 때 핀다는 옛말을 상기시키면서 주민들이 염려하는 바와는 달리 올해에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해명에 나서고 있다. 한편 경북대학 식물학교수 양인석 박사는 ‘왕대나무는 60년 만에 1번씩, 종대나무는 기후의 변동 또는 토질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꽃이 핀다’고 알리고 ‘제주도에서는 옛날에 춘궁기에 대나무 열매를 따먹고 살기도 했다는 학설이 있으니 세간에 떠도는 허망한 낭설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 매일경제, 1970년 6월 13일
“일본 중부 지방 장야(長野)시 근처 송대(松代)라는 고장은 세계적으로 지진이 잦기로 유명하다. 1965년 8월에서 1966년 12월 사이에 기록된 지진이 무려 56만 번 이상, 하루 6백61회나 발생한 때도 있었다. 지진의 나라 일본 곳곳에 요즘 대나무꽃이 만발, 대진재(大震災)의 전조가 아닌가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대나무꽃은 1백20년을 주기로 난개하는데 재난의 흉화(凶花)라 전해 오고 있다.”
― 경향신문, 1976년 7월 31일
갑자기 웬 옛날 신문기사인가 하진 않겠지요. 눈치 채셨겠지요. 네 오늘은 대나무와 대나무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나저나 대나무꽃을 본 적 있는지요? 저는 예전에 한 번 탐석하러 다닐 때, 정확한 장소는 기억나질 않는데,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대나무도 꽃을 피운다는 것을. 그런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대나무도 식물이고 풀인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대나무꽃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대나무는 그냥 대나무로 왔다 대나무로 가는 것이라고 당연한 것처럼 그리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살다 보면 너무 당연해서 아니 너무 당연하다고 믿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지만 알고 보면 그 당연함 속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들이 제법 많지요.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사실이 알고 보면 사실이 아닌 경우가 오해였던 경우가 제법 많지요. 대나무꽃이 제겐 그런 경우였더랬습니다. 대나무라고 부르지만 대나무가 실은 나무가 아니고 풀이란 사실이 그랬고, 대나무는 대나무인 채로 나고 자라는 줄 알았지만 실은 꽃을 피운다는 사실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대나무의 겉모양을 보고 그저 ‘지조’니 ‘인내’니 ‘절개’니 하는 말을 갖다 붙여 저 이로운 대로 대나무를 써먹었지만, 대나무는 그저 대나무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복효근 시인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지요.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 복효근, 「어느 대나무의 고백」 전문
대나무는 그저 대나무의 방식대로 한 삶을 꾸려가는 것인데, 다만 사람이 대나무에 자신의 이야기를 입힌 것이지요. 본래의 대나무는 사라지고, 사람이 덧씌운 이미지로서의 대나무만이 남은 것이지요.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시뮬라시옹이니 시뮬라크르니 어렵게 설명하지만, 간단한 말입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믿고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아, 또 말이 딴 길로 새려고 합니다. 실은 그런 작은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지요. 시 한 편만 더 읽고 하려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음습한 기운이 대밭 사이로 흘러다닌다
등이 시퍼런 바람도 디딜 곳 없어
자꾸 허방을 짚는다
육십 년 만에 우듬지에 핀 좁쌀 같은 꽃
꽃 피는 걸 잊으면, 백이십년 후 다시 핀다는데
어찌 죽을 날짜를 기억했을까
새 한 마리 무게도 놓치지 않고
몸을 굽혀 받아 안더니 수십 년 뼈마디 늘려 허공을 타고 오르더니
제 몸 묻을 곳, 저 곳이었다
그가 평생 키운 것은 소리였다
칸칸의 마디에 저장한 새 울음과 바람을 꺼내
그를 연주했던 것
눈이 침침한 늙은 왕대나무
즐겁게 귀를 적시던 소리 동이 났으니
이제 다시 몸을 켤 수 있을까
그는
유언처럼 흰 우듬지꽃의 마음으로
대숲에 우는 묵언, 바람소리로
공중 아득한 높이에서
왕대나무
소리없이 영혼 꼿꼿하게 눕히고 있다
― 최태랑, 「나무의 유언장」 전문
대나무는 그저 대나무의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최태랑의 시를 읽다가 그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진짜 대나무의 생을 통해, 대나무의 꽃핌을 통해 그리하여 마침내 대나무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진실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 말입니다. 대나무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짜 유언은 무엇일까.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요?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는 사실, 대나무는 생식을 위해 꽃을 피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 대나무 숲은 알고 보면 한 뿌리에서 나온 여러 줄기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래서 대나무 숲에 꽃이 피면 한꺼번에 일제히 피었다가 한꺼번에 모두 말라죽는다는 사실. 그야말로 ‘대나무의 묵시록’과 같은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대나무에 덧씌울 수 있을까요?
대나무의 꽃핌과 대나무 숲의 죽음은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 대나무가, 대나무의 꽃핌이 우리 인류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 지구상의 어떤 생물도 인류만큼의 문명을 꽃피우지 못했지요. 아니 문명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종이 어쩌면 인류이지요. 그런데 그 인류가 피워낸 문명이라는 그 꽃이 어쩌면 대나무의 꽃핌, 대숲의 꽃핌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꽃핌이 끝나는 날 어쩌면 우리 인류도 대숲처럼 일제히 그 생을 다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대나무꽃이 말하는 것은 결국 인류에 대한 어떤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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