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 / 변희수 원목변희수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나무가 팽창하고 있다 나뭇잎이 분열하고 있다 나뭇잎은 나뭇잎을 뒤덮고 새들이 먼지처럼 날아오르고 있다 나무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폭발한 꽃을 들고 나오고 있다 원목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창세기로 읽고 있다 ♧...참한詩 2024.05.20
방천시장의 봄 / 이하석 방천시장의 봄이하석 대구 중구에서봄을 제일 먼저 파는 데는당연히, 방천시장 입구다.겨울의 끝에서 먼 데 할머니가 캐 와서새삼, 수줍수줍 펴 보이는냉이의 봄 뿌리가 파라니희다.어떻게 한 움큼 쥐어주든천 원을 안 넘어,아무도 못 깎는 절대의 봄값.시장의 아침 그렇게 열어놓고일찍 장사 끝낸 할머닌또 손주 밥 먹일 때라며 서둘러버스로 돌아간다.시장통 입구에종일 밝게 남아 있는,할머니 냉이꽃처럼 앉았던봄 성지(聖地) ♧...참한詩 2024.05.20
청보리밭 / 사윤수 청보리밭사윤수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겠다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 단위로 헤아린다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짓는 법이 없고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 물이 들었다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짐승은 바람의 안무에 초록 비단 춤을 춘다 ♧...참한詩 2024.05.20
미안한 밥상 / 이상호 미안한 밥상이상호 배우자를 빗대어 부르는 반려자보다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더 낯익어지고 목숨은 같다는 평행이론 동정심이세상에 뜨거운 바람으로 불어오니 밤새 내 피를 빨아먹은 저 모기를당장 잡아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갓 뽑은 채소로 차린 아침상을 받고침샘이 마르는 참 낯선 일상에 실색 ♧...참한詩 2024.05.13
꽃의 보복 / 이상호 꽃의 보복이상호 모가지만 잘려 와서분노하는 우리를더욱 아름답다고희희낙락 바라보는저 인간들에게 우리는보복하기로 했다.절대로 열매를 맺지 말자고굳게 다짐했다.나는 가끔 시계의 창문을 부수고 싶었다 ♧...참한詩 2024.05.13
선사의 설법 / 한용운 선사의 설법 한용운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참한詩 2024.04.18
시인의 재산 외 21편 /최서림 시인의 재산 최서림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하늘은 내 것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새털구름도 내 것이다. 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내 것이다. 너무 높아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새도 듣고 바람도 듣고 천산남로 어떤 종족은 아직도, 땅이나 집을 사고팔 때 문서를 주고받지 않는다. 도장 찍고 카피하고 공증을 받은 문서보다 사람들 사이 약속을 더 믿는다. 돌궐족이 내뱉는 말은 하늘도 듣고 땅도 듣고 새도 듣는다. 낙타풀도 지나가는 바람도 다 듣고 있다. 글자는 종이 위에 적히지만 말은 영혼 속에 깊숙이 새겨진다. 바위에다 매달아 수장시켜버릴 수도 불에다 태워 죽일 수도 없는 말. 세상의 안이면서 밖인 나의 고향집, 엄마의 몸은 이 세상.. ♧...참한詩 2024.01.27
모래, 노래 / 문성해 모래, 노래 문성해 옛날의 노래는 모래였다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파고들었다네 누군가 와서 상한 깃털 같은 마음을 모래 속에 파묻고 가면 파도가 데려가 씻기고 씻기고 햇볕은 말리고 바다는 절여주고 갈매기는 품어주었다네 흰 알처럼 옛날의 노래는 하루종일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네 그 위에 뒹굴 수 있었다네 부드러운 요처럼 부서져 내린 노래는 스스로 마을로 흘러들어 부뚜막에도 뜨락에도 요대기 위에도 포슬포슬 기어들어 까슬까슬 눈동자 속을 파고들었다네 심장 속에도 붉게 박혔다네 어떤 노래는 아주 사적이라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퍼갈 수 없었다네 ♧...참한詩 2023.11.05
고독이 거기서 / 이상국 고독이 거기서 이상국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바닷가에 '고독'이라는 까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인데 지날 때마다 마당에 차 한대 없는 걸 보면 고독이 정말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은 아주 오래된 친구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이나 밤을 맡겨놓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온몸을 간판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참한詩 2023.11.05
노숙 / 김사인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참한詩 202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