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43

정오의 聖所 / 강문숙

정오의 聖所 강문숙 아픔 없는 인생 없다 상처 없는 삶이 없다, 나는 시의 입을 빌려 말했지 병도 나의 스승이었고 꽃은 저 나무의 상처라고 가만히 고개 숙여 나를 위로했지 가시의 나중이 장미였거나 처음부터 가시였던 장미이거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혹은,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목숨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 그 간절함으로 장미가 핀다는 걸 오래된 저 담장만이 알고 있지 가시를 껴안았더니 장미꽃이 피었구나 울고 있는데 가시관을 쓴 그의 이마에 흐르는 피 나를 들어 올린다 장미를 받아 적는 저 담장에 잠언처럼 가시가 박히는 붉은 정오의 聖所

♧...참한詩 2023.05.26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 마경덕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마경덕 ​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습니다 자극이 없으면 그저 냄비는 냄비, 물은 물일뿐입니다 예민한 양은 냄비는 한 방울 두 방울 수면으로 기포를 끌어올립니다 물의 껍질이 톡톡 벗겨지고 있습니다 맥박이 뛰고 물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격렬해집니다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물의 탈피는 기화(氣化), 아니 우화입니다 물은 날개를 달고 증기는 천장까지 날아오릅니다 건조하고 까칠한 실내 공기가 촉촉하고 말랑해집니다 한 바가지 물이 반 컵으로 졸았습니다 냄비는 바짝 수위를 낮추고 물의 입자들이 빠르게 창밖으로 증발합니다 이곳을 탈출해 구름이 되려는 물의 체위는 순항입니다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완벽하게 존재를 지우고 하늘의 품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탈피를 마친 물은 ..

♧...참한詩 2023.05.16

의자 / 이정록

의자 이정록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참한詩 2023.04.17

시월 / 이복규

시월 이복규 네가 떠나고 다시 볼 수 없을 때 나는 함양에 갔다고 할 것이다 함양시장 입구 황태해장국집 지나 가을볕에 꼬들꼬들 잘 마른 할머니들이 내놓은 산약초 좌판을 지나 병곡순대 집에 갔다고 할 것이다 오다가 진주 중앙시장 사거리 리어카에 튀김옷 입고 끓는 기름에 정갈하게 몸을 눕힌 새우와 고추를 한입 물고 골목 안 제일식당을 지나 하동집에서 양은냄비에 졸복 지리 한 그릇 먹고 왔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거리다가 해질녘 남강 둔치에서 유등을 한참이나 보았다고, 축제마다 떠돌던 각설이들 다 팔아도 남는 것도 없던 사람들 등 뒤로 해 지는 남강을 바라보며 거제로 돌아와 처음 신혼살림을 차렸던 능포, 새마을식당 지나 어린 딸을 업고 해풍을 잠재웠던 방파제에 앉았다가, 낚시꾼에게 오늘 무..

♧...참한詩 2023.04.11

다대포 일몰 / 최영철

다대포 일몰 최영철 해지는 거 보러 왔다가 해는 못 보고 해지면서 울렁울렁 밟아놓고 간 바다의 속곳, 갯벌만 보네 해가 흘려 놓고 간 명백한 지문 어서 바닷물을 보내 현장검증 중인 지문을 지우지만 갯벌은 해가 남긴 길고 긴 증거를 온몸으로 사수하네 시부렁 지부렁 등을 밀어붙이며 그 지문에 다 쓰여 있다고 한 여인이 재빨리 와 이 과격한 문서를 저 혼자 읽고 숨기네 뒤꿈치로 쿡쿡 밟으며 쑥쑥 지우며 (문학사상, 2003.2)

♧...참한詩 2023.04.09

숟가락의 날들 /김형로

숟가락의 날들 김형로 아이 다 키웠는데 숟가락 들고 먹여주는 일 또 있다 이소離巢 중 다친 딱새에게 달걀노른자를 으깨 먹였다 부러진 날개를 늘어뜨리고 새벽에 짹! 하고 어미 부르는 소리 손아귀에 쥐고 숟가락으로 떠먹였다 오늘은 할미꽃 새싹에게 뜨물을 먹였다 싹 틔운 상토에 얼마큼 먹을 게 있겠나 싶어 두 떡잎으로 서있는 어린것에게 뜨물을 차 숟가락으로 먹였다 신기하게도 숟가락 쥐고 떠먹이면 나는 고요해지고 낮아진다 옴팍하니 작은 것이 영물스럽다 나는 오늘도 숟가락으로 내 몸에게 떠먹인다 먹는 게 아니라 떠먹인다 생각하면 내 몸이 측은해진다 떠먹이는 숟가락에게 입을 벌리고 쓰윽, 숟가락을 훑는 입술이며 혀가 고맙다 모오든 쇠붙이는 가더라도* 이 야무진 것은 남아야 한다 요망진 숟가락의 신비다 *신동엽의 시..

♧...참한詩 2023.04.01

삐딱함에 대하여 / 이정록

삐딱함에 대하여 이정록 지구본을 선물 받았다. 아무리 골라도 삐딱한 것밖에 없더라. 난 아버지의 싱거운 농담이 좋다, 지구가 본래 삐딱해서 네가 삐딱한거야. 삐딱한 데다 균형을 맞추려니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맨날 술 드시고요? 삐딱하니 짝다리로 피워야 담배 맛도 제대로지 끊어 짜슥아! 아버지랑 나누는 삐딱한 얘기가 좋다. 참외밭 참외도 살구나무 살구도 처음엔 삐딱하게 열매 맺지. 아버지 얘기는 여기서부터 설교다. 소주병이란 술잔도 삐딱하게 만나고 가마솥 누룽지를 긁는 숫가락도 반달처럼 삐딱하게 닳지.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삐딱한 것도 좋은 열매란 증거야, 설교도 간혹 귀에 쏙쏙 박힐 때가 있다. 이놈의 땅덩어리와 나란히 걸어가려면 삐딱해야지.

♧...참한詩 2023.03.23

거대한 뿌리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김수영 ​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이후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참한詩 2023.03.17

봄밤 / 김수영

봄밤 김수영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참한詩 2023.03.17

공자의 생활난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伊太利語(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참한詩 202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