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43

폭우 /사윤수

폭우 사윤수 비가 이 세상에 올 때 얼마나 무작정 오는지 비에게 물어볼 수 없고 모르긴 해도 빈 몸으로 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면서 생각하니 급했던지 다 와서는 냅다 세상의 가슴팍을 때리고 걷어차고 다그친다 무엇을 내놓으라고 저렇게 퍼붓나 내가 비의 애인을 숨긴 것도 아닌데 쏟아붓는다 들이친다 하다가 안 되니까 제 몸을 마구 패대기친다 어쨌든 들어오시라 나는 수문을 열고 비의 울음을 모신다 비의 물고기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온다 방 안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 인사불성 표류하는 비의 구절들 비는 이미 만취가 되었으므로 비가 들려주는 시, 비가 부르는 노래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다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괜찮아 하면서 달랜다, 비의 등을 다독인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비의 눈이 퉁퉁 부었다 밤낮을..

♧...참한詩 2022.09.25

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입에 거품을 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사자후로 밀어붙이는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약을 파는데 내가 어떻게 약을 사지 않고 베기겠어 약장수의 열변을 들으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고 오만 병에 걸린 거 같고 저 약을 먹지 않으면 머지않아 내가 시들어버릴 거 같은데, 만병통치 불로장생이 이토록 감동을 주니 약을 향해 지금 손들지 않으면 북적이는 틈에서 소외될 거 같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안 올 거 같으니까 거금이라도 지를 만하잖아? 아직 카드 한도가 남았고 36개월 무이자 할부도 된다니 괜찮은 흥정이잖아? 약장수를 심으면 약 나무가 자라고 약이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도 해봤지만 어쨌든 저 잘 생긴 약장수를 남겨놓고 나만 혼자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부지런히 ..

♧...참한詩 2022.09.25

쉰 / 정일근

쉰 정일근 아침에 끓인 국이 저녁에 다 쉬어버렸다 냄비뚜껑을 열자 훅하고 쉰내가 덮친다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 일상의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던 시간의 게릴라가 내 몸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나이를 묻는다 이목구비 오장육부 나와 함께 사는 어느 것 하나 나이보다 뒤처져서 천천히 오지 않는다 냄비에 담긴 국을 다 쏟아버렸지만 사라지지 않는 쉰내 냄비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쉰내 이미 늦었다 나의 생은 부패를 시작했다 내 심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빠르게.

♧...참한詩 2022.08.14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리며 / 정일근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리며 ​정일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린다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다면 나는 혁명할 것이다, 조국에서 내 사랑의 시작은 신기루였고 내 사랑의 끝은 폐허였다 세계는 오래 전부터 하나인데 사랑하는 조국은 여전히 나눠져 있다 21세기의 하나뿐인 분단민족이여 나는 이 이분법이 이제는 지겹다 초원으로 가서 사랑을 하고 싶으니 쇠를 녹이는 끓는 사랑을 하고 칸이 될 수 있는 사내를 낳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내 성씨를 물려주고 네 제국을 만들라 유언할 것이다 고백하자면 반도는 사랑하기에 너무 좁다 북쪽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남쪽에서의 꿈은 꿈마다 숨이 막힌다 칸이 아니면 또 어떠랴, 딸이 태어난다면 바람이라는 뜨거운 이름을 주고 초원의 시인으로 살게 할 ..

♧...참한詩 2022.08.06

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 나나오 사카키

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나나오 사카키 일 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할 수 있다. 십 미터 크기의 집 안에서는 편히 잠들 수 있고, 빗소리 또한 자장가처럼 들린다. 백 미터 크기의 밭에서는 농사를 짓고 염소를 키울 수 있다. 천 미터 크기의 골짜기에서는 땔감과 물과 약초와 버섯을 구할 수 있다. 십 킬로미터 크기의 삼림에서는 너구리, 찌르레기, 나비들과 뛰어놀 수 있고 백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여름엔 남쪽의 산호초를 구경할 수 있고 겨울엔 북해에 떠다니는 얼음산을 보러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지구의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으리라. 십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반짝이는 별들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백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

♧...참한詩 2022.08.01

줍다 / 나희덕

줍다 나희덕 ​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갔었어요 검은 갯벌 속의 조개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이었지요 ​조개를 줍든 이삭을 줍든 감자를 줍든 상자를 줍든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한다는 것 무엇을 만들거나 사지 않아도 돼요 줍고 또 줍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쓰레기, 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지 않나요? 누군가 남긴 음식이나 물건이 그렇게 표현되는 건 슬픈 일이지요 그들은 버림으로써 남긴 거예요 나의 나날은 그 잉여만으로도 충분해요 ​어떤 날은 운이 아주 좋아요 누군가 먹다 남긴 피자가 상자째 놓여 있기도 하지요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신선한 통조림 기분좋은 말 몇 마디나 표정을 주워오기도 해요 이따금 인상적인 뒷모습이나 그림자를 줍기도 하지요 ​자아, 둘러보세요 주울 것들은 ..

♧...참한詩 2022.07.20

하늘나라의 옷감 / 예이츠

하늘나라의 옷감 예이츠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과 낮의 밝음과 어스름한 빛으로 된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의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밖에 없으니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참한詩 2022.06.13

숲에 살롱 / 최은우

숲에 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

♧...참한詩 2022.06.01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 이종근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이종근 내게도 봄내 그윽한 매화인 듯 나눠 주겠소 연거푸 몇 번 속내 드러내듯 프러포즈하는 서찰 꼬깃꼬깃해서 보냈건만 따뜻한 공깃밥 구경은커녕 편히 잠 이룰 수 없는 밤이 길었소 나 역시도 아버지 정이 진정 그리워 어린 나이 내내 회앓이로 아팠고 한동안 피 토하듯 소낙비로 울었소 광한루원(廣寒樓園) 곳곳이 풋바람 나고 요천(蓼川)의 흐르는 물 건너는 각기 다리마다 후들후들하오 그 변치 않을 절개 때문에 남원골 찾아왔소 본디 내 족보는 열에 아홉 중 탐탁지 않고 가슴팍에 숨긴 마패의 힘이 없어도 애끓는 순정은 과히 그넷줄의 품 넘친다오 어서 강 따라 바다 건너 평등 이룬 섬 저어기 율도국(栗島國)으로 함께 가오 서자(庶子)의 격한 울분이고 차분한 반란이오

♧...참한詩 2022.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