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43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배한권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참한詩 2022.01.14

나의 하나님 / 김춘수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참한詩 2021.10.24

오후의 언덕 / 성향숙

오후의 언덕 성향숙 오늘의 종착지는 언덕입니다 애프터눈 티 카페, 오후만 존재하는 계절 삼단 접시의 휴식이 나오고 나는 차근차근 올라가 언덕의 체위를 호흡합니다 하이힐처럼 우뚝 흥겨운 바람입니다 수다 떨기 좋은 이파리와 노랑국화가 흘러가는 언덕, 멈추면 눈 감기 좋은 햇살이 스며듭니다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24층에서 뛰어내린 영화배우가 여기 있다는데 죄책감 없이 호흡합니다 오랜 발목이 저릿합니다 오후만큼 달콤한 죽음을 수혈하기 좋은 언덕 굳은 발바닥은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응답 없는 해피투게더의 비상구는 나른한 햇살이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미남 배우를 만납니다 마지막 접시가 추가되고 근근 이어지는 오후지만 배우와 나의 간격은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고용와 그늘을 구분 짓는 언덕을 넘어 관념들, 침묵들, 안..

♧...참한詩 2021.10.23

소가죽 소파 / 정익진

소가죽 소파 정익진 우시장에서 소 한 마리 사들였다. 거실에 가둬 놓고 우리는 소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뻣뻣했던 소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소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소의 등 뒤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소의 배 위에 올라타 오랜 시간 TV도 보고 책도 읽고 간식도 먹었다. 특히 우리 집은 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각자의 몸무게를 던진다거나 옷을 있는 대로 걸쳐 놓기도 하고 과도를 잘못 던져 목 부위가 찔리기도 했다. 등뼈가 휘어질 정도로 심한 장난을 친 때문인지 소의 발목이 부러졌다. 임시로 부목을 대어 주고 붕대만 감아주었지 제대로 된 치료는 해주지 않았다. 소는 소였다. 한마디 아프다는 소리 하지 않았다. 소가 우리 집에 온 지 십 년이 넘어간다. 소의 껍질이 완전히..

♧...참한詩 2021.10.22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저 거리의 암자 신달자 어둠이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 속풀이 국물이 바글바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 젓가락으로 잡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 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채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 비워진 소주병이 ..

♧...참한詩 2021.09.11

방음벽 / 마경덕

방음벽 마경덕 돌진하는 새들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봄부터 이어진 박새 참새 곤줄박이의 투신이 지역신문 헤드라인이 되려면 더 많은 새들이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새들만이 아니었다 사차선 차도에서 튕겨 나와 벽과 충돌한 굉음은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신기루와 비행이 만나는 지점, 이곳은 묘지였다 질주하던 속도와 정면충돌한 사건이 중앙선을 넘고 벽을 뛰어넘었다 무단침입한 잡음은 아파트보다 높이 자랐다 최대한 키를 높여 달려드는 소리를 죽이겠다고 잠을 설친 의견들이 둘러앉았다 방음벽은 마지막 배수진 주민들은 새들 따위는 금방 잊었다 새의 죽음을 이야기한 시인이 있었지만 날아오는 화살에 곧 입을 다물었다 담쟁이를 심자던 숲해설가도 일조권에 밀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새들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했지만 새들은 스스로 머리를..

♧...참한詩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