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43

토끼 이야기 / 조은길

토끼 이야기 조은길 우리에 감금된 채 털을 빼앗기고 온몸을 난자당해 죽은 짐승이 있다 피비린내 앙등하는 주검위로 불덩이 같은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천년이 흘렀다 살아서 우리를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천년을 하루같이 귀를 쫑긋 열어놓고 빨갛게 뜬 눈으로 지새우게 한다 동을 바짝 웅크리고 낮고 연한 풀잎만을 고집해서 먹는것은 밀림의 시절 검은 독수리를 피하려다 붙은 어쩔수 없는 습관이겠지만 그것이 살결을 연하고 향기롭게 하고 털을 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되고 말았다 천년동안 수많은 신이 그들의 우리를 다녀갔지만 그들에게 등을 쪽 펴라든가 낮고 연한 풀잎을 먹지 말라든가 우리는 빠져나가는 기술을 귀띔해 주지는 않았다

♧...참한詩 2021.06.26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참한詩 2021.06.19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

♧...참한詩 2021.06.18

반대말 / 김소연

반대말 김소연 ​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 우..

♧...참한詩 2021.06.14

경운기 소리 / 문인수

경운기 소리 문인수 그 집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할아버지, 점심 때 집에 왔으나 할머니가 아직 오지 않아 대강 챙겨 자시고 다시 부지런히 경운기 몰고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아랫마을 갔다가 부랴부랴 집에 와 보니 에고, 이 양반, 맹물에 밥 말아 그냥 밥 떠 넣고 장 떠 넣고 한 눈치. 할머니 못내 속이 상해서 쯧, 쯧, 평소처럼 일거들 요량으로 한참 걸어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와락 달려들어 영감! 영감님을 부여안아 일으켰으나 119구급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어 묻은 흙 묻은 손.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 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 장면, 별사가 따로 있다. 무쇠 팔 경운기..

♧...참한詩 2021.06.10

굿모닝 / 문인수

굿모닝 문인수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째 굿모닝, 그런다. 한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거나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참한詩 2021.06.10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이것이 날개다 문인수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

♧...참한詩 2021.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