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45

숲에 살롱 / 최은우

숲에 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

♧...참한詩 2022.06.01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 이종근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이종근 내게도 봄내 그윽한 매화인 듯 나눠 주겠소 연거푸 몇 번 속내 드러내듯 프러포즈하는 서찰 꼬깃꼬깃해서 보냈건만 따뜻한 공깃밥 구경은커녕 편히 잠 이룰 수 없는 밤이 길었소 나 역시도 아버지 정이 진정 그리워 어린 나이 내내 회앓이로 아팠고 한동안 피 토하듯 소낙비로 울었소 광한루원(廣寒樓園) 곳곳이 풋바람 나고 요천(蓼川)의 흐르는 물 건너는 각기 다리마다 후들후들하오 그 변치 않을 절개 때문에 남원골 찾아왔소 본디 내 족보는 열에 아홉 중 탐탁지 않고 가슴팍에 숨긴 마패의 힘이 없어도 애끓는 순정은 과히 그넷줄의 품 넘친다오 어서 강 따라 바다 건너 평등 이룬 섬 저어기 율도국(栗島國)으로 함께 가오 서자(庶子)의 격한 울분이고 차분한 반란이오

♧...참한詩 2022.05.26

오월 / 유홍준

오월 유홍준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 종달새를 먹는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참한詩 2022.05.25

덤 / 길상호

덤 길상호 감자 한 바구니를 사는데 몇 알 더 얹어주며 덤이라 했다 모두 멍들고 긁힌 것들이었다 허기와 친해진지 오래인 혼자만의 집, 이 중 몇 개는 냉장고 안에서 오래 썩어가겠구나 생각하는 조금은 비관적인 저녁이었다 덤은 무덤의 줄임말일지도 모른다고 썩어가기 위해 태어난 감자처럼 웅크리며 걸었다 하긴 평균연령 40세를 넘지 못하던 시대가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나는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아니지 덤으로 썩고 있는 것 상처를 모르는 철없는 싹처럼 노을 뒤에서 별 하나가 겨우 돋았다 덤으로 받아든 감자 몇 알이 추가된 삶의 과제처럼 무거운 길, 한 번도 불을 켜고 기다린 적 없는 집은 오늘도 무덤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참한詩 2022.05.15

손님 / 오탁번

손님 오탁번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 가는 길 감나무에 조랑조랑 열린 풋감을 보고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 엄마 말에 고개를 갸옷갸옷 하던 딸은 감나무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는 매미울음 따라 엄마 손 잡고 까불까불 걸어갔네 ​ 가을 어느 날 해거름에 시장 가는 길 빨갛게 익은 감이 탐스러운 감나무가지에 하얀 낮달이 꼬빡연처럼 걸려 있었네 다 저녁에 되어 엄마 손잡고 돌아올 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딸이 말했네 '엄마,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 ​ 개미가 기어다니는 보도블록을 걸어오는 길 엄마가 까치걸음 하는 딸을 보고 눈을 흘기자 '아기 개미를 밟으면 엄마 개미를 못 만나잖아?' 앙증스러운 어린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처녀적 시인의 꿈이 다시 생각나 미소지었네 시인은 못 됐..

♧...참한詩 2022.05.09

초록의 폭력 / 이소연

초록의 폭력 이소연 아무 데서나 펼쳐지는 초록을 지날 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지 ​ 초록은 왜 허락 없이 돋아나는가 ​ 귀가 없으므로 ​ 초록은 명령한다 초록은 힘이 세다 ​ 초록에 동의한 적 없습니다 초록을 거절합니다 초록이 싫습니다 합의하의 초록이 아닙니다 ​ "문란하구나" ​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 "초록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 나를 떠메고 가는 바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오후 웃음을 열었다가 닫는다 ​ 툭, 불거지는 질문처럼 아, 내가 지나치게 피를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 ​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2020 걷는사람)

♧...참한詩 2022.04.30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아름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다가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참한詩 2022.04.22

중심 잡기 / 조온윤

중심잡기 조온윤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그렇게 믿었던 나는 찬 돌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언 땅 위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다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 근면하고 성실하기 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걸을 땐 벨을 누르지 않아도 열리는 마음이 되며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인간을 위할 줄도 아는 것 혹은 자기희생 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내가 믿는 신이 넘어지는 나를 붙잡아줄 것처럼 눈 감고 길 걸어보기 헛디디게 되더라도 누구의 탓이라고도 생각 않기…… 그런데 새벽에 비가 왔었나요?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나는 그들의 부축을..

♧...참한詩 2022.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