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줍다 / 나희덕

김욱진 2022. 7. 20. 22:56

줍다

나희덕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갔었어요

검은 갯벌 속의 조개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이었지요

 

​조개를 줍든

이삭을 줍든

감자를 줍든

상자를 줍든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한다는 것

 

무엇을 만들거나 사지 않아도 돼요

줍고 또 줍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쓰레기, 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지 않나요?

누군가 남긴 음식이나 물건이 그렇게 표현되는 건 슬픈 일이지요

그들은 버림으로써 남긴 거예요

나의 나날은 그 잉여만으로도 충분해요

 

​어떤 날은 운이 아주 좋아요

누군가 먹다 남긴 피자가 상자째 놓여 있기도 하지요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신선한 통조림

기분좋은 말 몇 마디나 표정을 주워오기도 해요

이따금 인상적인 뒷모습이나 그림자를 줍기도 하지요

 

​자아, 둘러보세요

주울 것들은 사방에 널려 있어요

허리를 굽히며 다가가 건져올리기만 하면 돼요

손만큼 좋은 그물은 드물지요

다른 사람 몫을 조금 남겨두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그날의 해변처럼

빈껍데기만 남아 있지 않도록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