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43

나무로 살기 / 김윤현

나무로 살기 김윤현 음지 양지 따라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기 가지와 잎이 다르게 생겼다고 남을 내치지 않기 주어 없는 문장처럼 가볍게 호흡하기 매일 매일의 변화를 눈에 띄지 않게 이어가기 바람이 불면 때를 놓치지 않고 스트레칭하기 구름이 다가오면 지나갈 때까지 모른척하기 아무리 알아주는 이 없어도 뿌리는 드러내지 않기 어떤 일이 있어도 푸르름은 유지하기

♧...참한詩 2023.09.10

정직한 사람 / 나희덕

정직한 사람 ​ ​나희덕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피가 묵처럼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매일 다른 얼굴이 주어지는 아침, 오늘의 얼굴은 어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거짓말은 굳어갈수록 독기를 잃은 뱀의 말에 가까워진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거짓말과 비밀의 차이도 알고 있다 깊은 슬픔이 어떻게 거짓말 없이 전달될 수 있을까 연민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이 낫고 말의 순도보다는 말의 두께가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독기를 잃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도 있으니 누구도 그것을 거짓말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확정된 진실조차 없기에 정직함이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정직함에 대한 부정직한 이해만이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낼 뿐 ..

♧...참한詩 2023.09.03

가문비나무 / 안상학

가문비나무 안상학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가도 몸이 따라 아프면 살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면 겨울이 길어야겠습니다 고통을 새기려면 거센 바람이 오래 흔들려야 했습니다 슬픔을 아로새기려면 거친 눈보라가 제격이겠습니다 슬픔의 소리가 노랫말을 얻을 때까지 고통의 소리가 선율을 얻을 때까지 마음에 지지 않으려면 몸에 울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몸에 지지 않으려면 마음에 신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길고 긴 밤의 시간을 건너고 건너서 수없이 많은 겨울의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거짓말같이 봄이 오고 믿을 수 없는 여름이 오고 도둑같이, 다시 겨울을 부르는 가을이 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던지겠습니다 누군가 내 몸을 잘라서 고통을 보자 하면 선율을 내놓겠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쪼아서 슬픔을 보자 하면 노래를 ..

♧...참한詩 2023.09.03

퇴행성 슬픔 / 김휼

퇴행성 슬픔 김 휼 바람이 멈추면 내 슬픔은 구체적이 됩니다 봄 흙에 젖살이 내릴 즈음 연둣빛 말문을 텄지요 태생이 곰살맞아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아요 잘 여믄 눈빛으로 성장기는 푸르게 빛났습니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가는 어느 날, 번쩍, 순간을 긋고 가는 일성에 난청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며 살았습니다 해야 할 일만 하고, 가야 할 곳만 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냈습니다 참는게 버릇이 되어버린 직립은 퇴행성 슬픔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야 했으며 뼈마디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렸습니다 손가락 뼈들이 뒤틀리고 있지만 경탄을 잃지 않으려 식물성 웃음만 섭취해 보는데 오백 년이라는 치명적 무게를..

♧...참한詩 2023.09.03

홍범도 장군의 절규 / 이동순

홍범도 장군의 절규 이동순 그토록 오매불망 나 돌아가리라 했건만 막상 와본 한국은 내가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네 그래도 마음 붙이고 내 고향 땅이라 여겼건만 날마다 나를 비웃고 욕하는 곳 이곳은 아닐세 전혀 아닐세 왜 나를 친일매국노 밑에 묻었는가 그놈은 내 무덤 위에서 종일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 하네 어찌 국립묘지에 그런 놈들이 있는가 그래도 그냥 마음 붙이고 하루 하루 견디며 지내려 했건만 오늘은 뜬금없이 내 동상을 둘러파서 옮긴다고 저토록 요란일세 야 이놈들아 내가 언제 내 동상 세워달라 했었나 왜 너희들 마음대로 세워놓고 또 그걸 철거한다고 이 난리인가 내가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을 왔네 나, 지금 당장 보내주게 원래 묻혔던 곳으로 돌려보내주게 나, 어서 되돌아가고 싶네 그곳도 연해주에 머물다가 함부..

♧...참한詩 2023.09.01

오늘의 특선 요리 / 김기택

오늘의 특선 요리 김기택 높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는 독수리 날개의 넓고 튼튼한 부력만을 골라 냉장 숙성시킨 후에 구웠습니다. 하루 중 가장 차갑고 맑은 시간에 터져 나오는 새벽 닭의 힘찬 울음만을 엄선하여 바삭바삭하게 튀겼습니다. 시속 111킬로미터로 달리는 치타의 근육이 만들어 내는 팽팽한 탄력만 가려내 담백하게 고았습니다. 발톱과 이빨이 간지러워 우는 고양이의 갓난아기 울음에서 애절한 눈빛만 솎아내 고소하게 볶았습니다. 수천 미터 밖 물살의 힘과 방향을 읽는 물고기 지느러미를 푹 끓여 고감도 감각만을 진하게 우려냈습 니다. 두근거리는 토끼의 심장에서 연한 놀람과 어린 두려움을 떨림이 살아 있는 그대로 발라내 갖은 양념에 무쳤습니다. 주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흔들어대는 개 꼬리에서 명랑하게 들뛰는 ..

♧...참한詩 2023.07.14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

♧...참한詩 2023.07.14

공부 / 김사인

공부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끓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참한詩 2023.07.12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참한詩 2023.07.12

새의 집 / 이규리

새의 집 이규리 귓속에 요란하게 비가 쏟아졌다 전정기관에 비가 집을 짓는다 가재도구가 흔들리고 새가 둥지를 틀었나 불빛이 들여다본다 어지러울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다고 웃음을 거두라는 말은 아니라고도 했다 뭐, 너무 반듯이 걸으려고 하지 마세요 벽을 의지하고 걷다 보면 벽을 이해하지 않을까요 비유법을 쓰는 의사를 신뢰하기로 하면서 벽을 믿어보았다 내가 밀렸다 천장에 동그라미들이 흩어지고 모이고 사라지는 동안 회전목마가 돌고 아버지는 오지 않고 치마가 짧아지고 있었다 여기가 우듬지구나 우듬지는 새의 집이구나 만질 수 없는 소리들이 가득 들어있구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특히 어지러웠는데 눈보라가 날리고 그때 아주 잠깐 피안이 있었고 눈이 베이고 황홀이야 그게 내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였다 나는 새의..

♧...참한詩 202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