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성 슬픔 / 김휼
퇴행성 슬픔 김 휼 바람이 멈추면 내 슬픔은 구체적이 됩니다 봄 흙에 젖살이 내릴 즈음 연둣빛 말문을 텄지요 태생이 곰살맞아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아요 잘 여믄 눈빛으로 성장기는 푸르게 빛났습니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가는 어느 날, 번쩍, 순간을 긋고 가는 일성에 난청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며 살았습니다 해야 할 일만 하고, 가야 할 곳만 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냈습니다 참는게 버릇이 되어버린 직립은 퇴행성 슬픔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야 했으며 뼈마디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렸습니다 손가락 뼈들이 뒤틀리고 있지만 경탄을 잃지 않으려 식물성 웃음만 섭취해 보는데 오백 년이라는 치명적 무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