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마경덕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습니다
자극이 없으면 그저
냄비는 냄비, 물은 물일뿐입니다
예민한 양은 냄비는
한 방울 두 방울 수면으로 기포를 끌어올립니다
물의 껍질이 톡톡 벗겨지고 있습니다
맥박이 뛰고
물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격렬해집니다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물의 탈피는
기화(氣化), 아니 우화입니다
물은 날개를 달고 증기는 천장까지 날아오릅니다
건조하고 까칠한 실내 공기가 촉촉하고 말랑해집니다
한 바가지 물이
반 컵으로 졸았습니다
냄비는 바짝 수위를 낮추고
물의 입자들이 빠르게 창밖으로 증발합니다
이곳을 탈출해 구름이 되려는 물의 체위는 순항입니다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완벽하게 존재를 지우고 하늘의 품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탈피를 마친 물은 냄비를 버리고
곧 절정에 오를 수 있습니다
털썩, 물이 주저앉습니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고
까무러친 냄비에
날개가 부러진 물이 둥둥 떠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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