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짓다
손택수
짓는 것 중에 으뜸은 저녁이지
짓는 것으로야 집도 있고 문장도 있고 곡도 있겠지만
지우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지
소멸을 짓는 일은 적어도 하늘의 일에 속하는 거니까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매일 같이 연습해 본다는 거니까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지상에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공깃밥이라는 말 좋지
무한을 식량으로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짓는 밥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에 이름으로
'♧...참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탕자의 기도 /손택수 (2) | 2025.06.11 |
---|---|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외 34편/ 손택수 (2) | 2025.06.09 |
녹슬지 않는 눈물이 있다 / 조두섭 (0) | 2025.06.02 |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0) | 2025.05.29 |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 강문숙 (0) | 2025.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