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안도현 시인이 추천하는 시

김욱진 2013. 12. 29. 15:10

          語訥
        -김춘수


누가 섬이 아니랄까 봐
저 멀리
그는 바다 위에 떠 있다.
누가 귀양 온 원추리가 아니랄까 봐
섬 한쪽에
그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해가 진다고
물새는 꺼이 꺼이 우는데
오늘도 누가
바다를 맨발로 밟고 간다.
아물 아물
가는 곳이 어딜까.
나는 이렇게 말이 어줍고
그는 결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문학사상'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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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푸레나무 곁으로
-김명인

그 나무가 거기 있었다
숱한 매미들이 겉옷을 걸어두고
물관부를 따라가 우듬지 개울에서 멱을 감는지
한여름 내내 그 나무에서는
물긷는 소리가 너무 환했다
물푸레나무 그늘 쪽으로 누군가 걸어간다

한낮을 내려놓고 저녁 나무가
어스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머리를 빗질하려고 문밖으로 나와 앉은
그윽한 바람의 여자와 나는 본다
밤의 거울을 꺼내들면
비취를 퍼올리는 별 몇 개의 약속,
못 지킨 세월 너무 아득했지만
내 몸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 들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도 얼비치던 그 여자의 푸른 모습,

나무가 거기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
나무를 걸어놓았던
흔적이 있던 그 자리에
나무 허공이 떠다닌다, 나는
아파트를 짓느라고 산 한 채가 온통 절개된
개활지 저 너머로 본다
유난한 거울이 거기 드리웠다
금세 흐리면서 지워진다

('현대시'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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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과 흰 뼈
-장대송

일식이 벌어지는 날 몸 속의 뼈들이 살을 털어낸다

날카로워진 뼈, 해를 가린 달을 찌르고 있다

뼈들이 끓는 물 속에 들어가 하얗게 탈색한다

망사처럼 얇아진 뼈에는 잔구멍이 숭숭하다

뼈 속 작은 구멍에서 태양풍이 불기 시작한다

삶의 가벼움에 짓눌렸던 뼈들이 날아간다

('현대시'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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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폭 3
-이영광

이월의 하느님이
협곡에 기대인 폭포를
천천히,
쓰러뜨린다

虛虛한 공중의 칼에 베인
지상의 허허한 빈 몸

나는 그 분이
빙폭의 투명을 두 손에 적시며
말없이
사라지는 걸 본다

무언가를 통과시키기 위해
번뜩이며 뼈를 드러내는 개울들
눈발에 허옇게 깎인 바위 절벽, 그리고

禁慾처럼 단단한 저 고요,
협곡은 이미 협곡을 빠져나가고 없다
여기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다

다만 뼈에 붙은 마음을 반드시 꺼내 가려는 듯
朔風의 억센 손아귀가 몸을
들었다 놓았다
들었다 놓았다 한다

('현대시'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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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주원지 왕버들
-장혜랑


가문 땡볕에 앉아 우거진 그늘 구경하는 것
그늘에서 끓는 땡볕 보는 것
허둥대는 쓸쓸함 없이 너그러워져
우연히 남이 되어 보는 시간

집이야 어딘들 못 짓겠나
사철 물에 몸 담근 왕버들 스무 식구
보는 이마다 보태어 준 측은으로
햇볕은 더 좋은 햇볕 단단한 약으로 쓰라고
골라 주었을 것이다

가만히 가까이 가
사는 것이 즐겁느냐 물어 본다
모두가 원하는 푸른 하늘이 제대로 된 하늘이 아니냐고
사람들 떼거리로 왕버들 구경 오는 것
보라 보라 보라

끝까지만 남겨 두고 허물거리는
썩어 수백 년 된 왕버들 곁에서
좋은 곳 없는가
바위 같은 세상 이 골짝 저 골짝 두드리는
더 이상 크지 않는 뿌리 몇 개 달린 가슴 내밀고
치즈, 김치 대신 그렇지요 정말 그렇지요 고개 끄득이며
사진 한 판 찍는다

('현대문학'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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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의 목격자
-최치언

아이의 동화책 속,
코끼리는 호박잎처럼 넓적한 귀를 펄럭거리며
미루나무 그늘 아래서 그물질하던 구릿빛 그에게 황급히 걸어간다
그는 코끼리가 다가와도 모른 척
그늘 속에서 물고기를 낚고 있다
이때, 황금빛 투구를 쓴 말벌이 저공비행으로 날아와
그와 코끼리 사이를 맴돌고 있다.
꿀항아리 같은 태양이 붉게 달아오른 봉고차 지붕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다 그늘이 그를 비켜
샛강 쪽으로 기울자,
그물을 어깨에 두르고 구릿빛 얼굴의 그가
무심한 듯 코끼리를 바라본다
그러나 코끼리는 말벌을 피해 그 커다란 궁둥이를 뒤로 살며시 빼며
무어라 웅얼거리며 달아나고 있다
불량한 말벌의 시선이 언덕 쪽으로 향하자
그와 코끼리는 칠판에서 지워진 듯 사라지고 없다
텅 빈 유원지 봉고차 안에서 마지막 침을 쏜 벌처럼
아이가 시름시름 땀을 흘리며
잠겨진 차창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말벌이 하나, 낄낄거리며
유원지 아이 살해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남는다.

('현대시'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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