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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무엇인가/이진흥

김욱진 2016. 9. 21. 15:56

시인이란 무엇인가 ? / 이 진 흥

1. 시인(詩人)은 시인(視人)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은 예술가>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따른다면 시의 근원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무엇인가를 해명하여야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골의 말처럼 <그 가슴에 심각한 고민을 품고 탄식과 흐느낌을 마치 아름다운 노래같이 부르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일까? 독일어의 시인(Dichter)이 의미하듯이 신의 뜻을 인간에게 번역해서 전하고 인간의 바램을 신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일까? 그도 아니라면 곳프리드 벤의 말처럼 <언어의 수공업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까? 모두 다 그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는 정의라고 여겨지지만 여기서 나는 릴케의 시인(詩人=Dichter)은 시인(視人=sehnder Mann)이라는 말을 논의의 단서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시인이 <보는 사람>이라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다는 말은 대상을 포착함인데 이때 대상이란 다름 아닌 존재의 진리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란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이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면 거짓이므로 존재의 진리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것이 아닌 그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에 있어서 그것을 그것으로 보지 못하고 종종 다른 것(거짓)으로 본다. 그 까닭은 우리가 여러 가지 욕망이나 잘못된 선입견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참으로) 보지 못하고 왜곡시켜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욕망과 선입견을 버리고 순수하게 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나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사물을 효용성으로 보지 말 것.

'장미꽃 뿌리는 파이프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바실라르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장미꽃 뿌리를 파이프(효용성)로 본다.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우리를 위한 사물(Ding fur uns)'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의 진리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날 때(존재의 진리가 보일 때) 그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 아닌 다른 것(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아름답지 않다. 예컨대 순수한 대지는 아름답지만, 그것을 대지로 보지 않고 부동산(효용성)으로 바라보면 아름답지 않다. 나무는 아름답지만 그것을 목재로 볼 때 그것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꽃을 꽃으로 보면 아름답지만 그것을 돈(상품)으로 볼 때 꽃의 아름다움(참모습, 진리)은 증발한다. 따라서 참으로 보기 위해서라면 사물을 이용대상(효용성)으로 보지 말고 순수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이에 대해서는 꽃에 대한 테니슨과 바쇼의 태도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3. 일상성의 파기 혹은 낯설게 하기

1917년 뉴욕 앙데팡당전에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하나 구입하여 라고 서명을 하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품했다가 거부 당했다. 그 때 뒤샹은 <일용품을 선택해서 새로운 타이틀과 시점에 의해 그 유용성을 상실하도록 그것을 배치시킴으로써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思考)를 창조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늘 통념적으로 생각해 온 변기라는 사물을 화장실에서 화랑으로 장소를 이동시킴으로 해서 변기라는 '도구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변기가 아니라 순수한 대상(오브제)이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우리는 사물을 대개 우리를 위한 사물로 보는데 일상화되어 있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통념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일상성을 파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롭게 보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낯설게 하기'이다. 러시아의 형식주의 비평가 쉬클로브스키는 예술이란 실생활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일그러뜨려 낯설게 함(defamiliarization)으로써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 낯설음이란 결국 익숙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것이며 그것을 만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늘 기존의 관념의 틀 속에서 사물을 보면 그것의 참모습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때때로 꾸기거나 일그러뜨리거나 관점을 바꾸어 봄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감추어져 있는 존재의 진리를 발견하여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이다.

4. 제 2의 창조자 또는 신화를 만드는 사람

시(詩)는 '言 + 持'라고 한다. 이때 持의 손을 의미하는 手는 무엇을 만든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그 手 대신 말을 뜻하는 言이 들어가서 '말로 만든다'는 뜻이 된다. 또한 영어의 poetry도 '행하여 만들다'라는 뜻의 희랍어 poiesis에서 나온 말이므로 이 시라는 명칭은 결국 '만들다, 창조하다'는 뜻이 되고 시인(poet)은 '만드는 사람(maker)',즉 '창조자'가 된다. 그리하여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를 제 1의 창조자라고 한다면 그 창조된 사물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주는 사람인 시인은 제 2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시인이 된다. 횔덜린의 말처럼 인간은 본래 지상에 시인으로서 살며 사물의 참모습을 보고 이름을 붙여 의미(신화)를 창조한다.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올림프스를 안정시켜 신들을 살게 하겠는가?'라고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묻는다. 올림프스라는 신화의 동산을 꾸며 신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 의미의 세계를 마련하는 일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신화(의미의 세계)가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바로 동물의 생존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동물적인 생존에서 벗어나도록 삶의 의미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5. 그리하여 시인은 신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다.

릴케의 아름다운 산문 '사랑스런 신에 관한 이야기'에 보면 '돌에 귀를 기울이는 사나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 등장하는 조각가 미켈란제로는 돌 속에 갇혀서 신음하며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끌과 망치로 돌을 쪼아서 신의 형상을 드러내 줌으로 해서 신을 해방시켜준다. 결국 조각이란 돌 속에 갇혀 있는 신을 해방시는키는 일인 것이다. 시인이란 바로 이런 조각가이다. 그러므로 신은 시인에게 의존한다.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신이여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만일 내가 죽는다면? 나는 그대를 담고 있는 항아리인데, 만일 내가 깨어진다면?' 이렇게 신을 해방시키며 신의 존재를 받쳐주는 엄청난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 끝>

<주머니 속의 행복> 주최
청소년을 위한 여름문학캠프 (99.5.25)에서

6. 시인의 눈

 

창조주가 지은 최초의 인간 아담을 나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주는 만물을 만들고 아담은 그 개개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데, 시인은 명명자(Nennender), 즉 사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사물에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순간 그 사물은 이름 붙여진 바로 그것이 된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시인은 사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볼노브의 말처럼 타고난 현상학자로서 사물의 본질을 직관하여 그것의 참 모습인 진리를 보는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진리란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오류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나도록 언어(로고스)로 불러내는 것이 바로 시작(詩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선입견에 물들지 않은 맑은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그것을 명명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시인이란 바로 보는 사람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사물을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세상의 온갖 욕망으로 때가 낀 눈을 닦아 순수한 눈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 맑고 순수한 눈을 가진 사람은 어린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어린이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어린이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속의 욕망에 찌든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다. 어린이는 맑은 눈을 가졌으므로 그것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시를 가르치면서 왜 어른들은 시를 잘 쓰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른들은 맑은 눈을 갖지 못했으므로 사물이 욕망의 렌즈에 굴절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굴절된 사물의 모습을 아무리 잘 묘사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감동을 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어린이의 글이 감동을 주는 것은 어린이의 순수한 시선 속에 사물의 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다 예술가이고 시인이다. 일곱 살 이전의 어린이는 누구든지 그림을 잘 그리고 누구든지 시를 잘 쓰고 누구든지 노래를 잘 부른다. 그러나 그 어린이가 나이를 먹으면 차츰 눈치를 보게 되고 힘있는 사람에게 아첨하게 되면서 자신의 본래적이 시선을 잃고 세속의 안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끊임없이 어린이의 맑은 눈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