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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떨 때 오는가/이승주 시인

김욱진 2016. 10. 6. 08:28

시는 어떨 때 오는가

 


이승주(시인)

 


1. 시님이 오실 때

 

 


  시는 어디에 있는가. 시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시님에게 감사해야 하고 다행한 것은 시님은 사방 어디에도 있거나 혹은 우리가 미처 몰라서 그렇지 당신과 나 우리들 가슴에도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 거미줄에 걸린 시, 꽃나무에 핀 시, 꽃가루받이를 끝낸 시, 소낙비에 뛰어오는 시, 낙엽을 밟으며 돌아가는 시, 막차를 기다리는 시, 사소한 오해 때문이 아니라면 운명의 장난인 이별 앞에 울먹이는 시…….

시님이 오시는 날은 칠년대한(七年大旱)에 단비가 오는 것처럼 반갑다. 첫사랑의 손을 처음 잡은 것처럼 설렌다. 그래서 시는 늘 첫사랑이다. 시는 늘 첫사랑의 설렘으로 온다. 그러나 시는 약속하고 오지 않는다. 기별하고 오지 않는다. 시는 언제 오는가. 시는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시가 언제 방문할지 약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시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시적으로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으로 긴장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늘 시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시가 왔을 때 시를 맞이하기 위해, 시를 찾아나서 시와 만나기 위해, 의식적 무의식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 밥 먹을 때 술 먹을 때, 연애할 때 이별할 때, 한밤중이나 신새벽이나 시가 우리의 감성을 노크할 때, 언제라도 우리가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시는 기억하지 못하는 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시님이 오셔서 시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때, 내 안에 이미 계신 시님을 깨달을 때, 주변의 풍경과 소음은 잠시 물러나고, 월말에 내야 할 집세 걱정도 그 순간 잠시 사라지고, 이목은 오직 시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반가운 님이고, 방금 보고 돌아서 보아도 다시 반가운 님이다. 오실 적마다 며칠은 그냥 매번 첫사랑인 시님을 품안에 품고 산다. 가슴에 품고 밥 먹고, 가슴에 품고 잠잔다. 옆에 사람이 ‘뭐 하노. 또 뭐, 멍 때리고 있노?’라고 해도 그 말은 하나도 살갗 안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시님을 품고 밤새 뒹굴다 곯아떨어진 새벽잠은 꽃잠처럼 달고 깊다.

 


2. 어떨 때 시님과 만나는가

 


그렇다면, 시는 어떨 때 오는가. 우리는 어떻게 시님과 만나는가.

무엇보다 먼저, 시님은 차별 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오시지만 우리의 가슴이 절절할수록, 절절하다 못해 우리의 가슴 둑이 터지고 무너지려 할 때, 무너지고 터지려 하는 우리의 가슴을 약손으로 다독이러 오신다. 아래의 시를 보면, 시란 생리식염수나 안약을 넣어서 나온 눈물이 아니라 제 가슴이 녹아서 나온 눈물이라고도 하겠다.

 

 


끝내는 이렇게 되고 말 걸

무슨 말을 하여야 하리,

이제 돌아서 가는 너에게.

꽃들도 저대로 목이 메어 슬프게

슬프게 울음을 참는 밤.

아, 허무하여라, 무슨 말이 가슴을 채우랴.

잘 가라 사랑, 젖어드는 우리들의 봄밤들이여.

그 달디단 가로등 불빛 아래.


붉은 눈시울의 나트륨가로등.

너는 떠나고 마지막 네가 보여주는 온달.

서럽구나, 달빛 몸 가벼워

연인처럼 손 맞잡고 걷는 가로수들아. 다 잘 있거라.

우리 이제 헤어져 오래 그립다가

추운 날 저녁 내 다시 이 거리로 찾아올 때

가로등아, 너는 혼자라도 아픔으로 남아

그때도 나를 기다려 주랴.

―이승주, 「잘 가라 사랑, 봄밤들이여」

 


  시로써 삶을 살 때, 자아와 세계에 대해 시로써 사유하고 시로써 관조할 때, 때로 시는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 우리에게 시를 선물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가 그러할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그를 가만 내려다보노라면, 그의 코가 어딘지 잉어를 닮았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그의 얼굴 한가운데서 격하게 열렸다 닫히는 아가미. 어디서 온 잉어일까. 잉어도 운다는 말, 그 새벽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슬픈 잉어는 그를 떠날 수 없다.

―이승주, 「잉어」


 

  위의 시는 고개를 숙이고 격하게 흐느끼는 누군가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 확장과 원상태를 반복하는 그의 코(콧구멍)가 문득 (슬픈) 잉어(잉어의 아가미) 같다는 직관적인 인상을 시화한다.


  한편, 시는 성찰이나 사유를 통해 만날 수도 있다. 이때, 삶이나 대상에 대한 사유나 성찰을 통해 시와 접신될 때, 우리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누구나 시인이 되어 그 감동이나 떨림 혹은 연민을 받아적는다. 아래의 시는 인간들에 의해 자행되는 야만적이고도 집요한 생명 착취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사유가 그대로 한 편의 시로 빚어진 예라 할 것이다.

 


어느 날 비닐하우스 옆을 지나다 우연히

차마 못 볼 것 보았다

반쯤 올려진 깻잎하우스의 비닐창 틈으로

마침내 드러난 살육의 참상

살점 한 잎까지 다 발겨 뜯긴 후에

뼈대만 버려진 그 현장

벚꽃이 지고 감자꽃이 필 때

출퇴근길 그 옆을 지나며

하우스일 하던 인부들의 구부정한 허리를

부지런하다고 존경한 적 있지만

생각들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자

자꾸만 목에 걸려오는 억센 두려움의 가시

물기를 털어내며 삼겹살을 싸고 있는 딸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밤마다 번갈아 꺼지고 켜지는 하우스의 불빛을 성가셔 했지만

그것이 김씨 장씨의 꿈이라고 한 말들을

이제 다시 고친다

―이승주, 「어느 날 비닐하우스 옆을 지나다 우연히」

 


시는 또 우리가 대상과 교감(交感)하는 그 순간에 섬광처럼 퍼뜩 몸을 드러내기도 한다.

 


덩굴손은 왜, 생각이나 있는 것처럼

그 거미줄을 돌돌 감고 있었을까

축 늘어진 시간이

군데군데 뚫린 구름을 깁고 있는 기미도 못 챈 채

무슨 법칙처럼 완강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손목을 틀면서


또 왜, 그때 그 덩굴손은

무슨 생각이나 난 것처럼

감았던 제 손을 얼른 풀고는

거미줄 밖 허공의 피부를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고개 돌려, 날 그렇게 쳐다봤을까

―김동원, 「덩굴손」


 

  위의 시에서, “시인은 우주에 충만한 삼라만상들의 행위와 연관해 덩굴손의 의도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그 해답을 탐색하는 한편 덩굴손과의 교감이 이뤄지는 눈빛 교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획한다.“ (《서정과현실》 2011년 하반기호 이승주의 '내가 읽은 시' 중에서)

 


  아래의 시는 대상과의 교감 혹은 동화(同化)의 순간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이나 응시를 통해서도 보물찾기의 감춰진 쪽지처럼 시를 발견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눈창을 닫아도

눈창을 열어도

딸기에 딸기씨앗들 촘촘 박히듯

빛의 씨앗들

촘촘히 박힌 어둠이다.

양변기에 물을 내리듯

시간이 다 흘러내리고 고인 어둠이다.


지독한 어둠이다.

원액의 어둠이다.

기침소리조차 헤어날 수 없는

뻘 같은 어둠이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끈적한 어둠.


어둠을 뱉어내며

점점 뻘 속으로 빠진다.

자진해서

어둠의 감옥에 갇힌다.

어둠의 감옥에 갇혀

간절히 원하다 마침내 보고픈

어둠의 알몸.


이상하다, 점성이 강해질수록

나는 어둠 속에서 점점 투명해진다.

딸기의 딸기씨앗마냥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쫓아오는

수천 수만

빛의 눈동자.

피처럼 입 안 가득

자꾸만 엉기는 어둠.

어둠의 비린내.

이건 내가 갈망하는 어둠의

체취가 아니다.


내 몸은

어둠의 비린내에 싸여

바닥에 눕혀진다.

―이승주, 「오래 고인 어둠」

 


이밖에도, 애틋한 추억이나 회상도 시의 신방(新房)에 이르는 회랑이겠다.

 


1

볼품없는 열매를 위해 꽃들은 헛되이 투신했다.

 


2

쓸쓸하게

밤비소리가 들려준 어둠의 나라로

불면의 영혼들을 싣고 떠난 풀벌레들 울음마차.

먼 산들이 몸을 바꾸어

겨울보다 깊은 계절을 건너는 동안

배암처럼 재빠르게 풀섶으로 사라진 물길들은

얼음의 고치를 준비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계란껍질처럼 얇아지고

겨울이 닥치기 전에

폭설이 먼저 내렸다.

여기저기서 이웃들 사이에 다리가 무너지고

고치가 있는 사람들은 귀가를 서둘렀지만

손끝이 시린 풀잎들

근심의 잔뿌리 더욱 깊었다.


 

*대구 중앙로 전통찻집.

―이승주, 「동다송*시대(東茶頌時代) 2 ―그해 가을」


 

■이승주 :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 『내가 세우는 나라』 『위대한 표본책』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