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조용미

김욱진 2018. 2. 5. 14:47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조용미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할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초라했는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시인동네》201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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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기억의 행성』『나의 다른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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