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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자야, 그리고 법정스님

김욱진 2018. 8. 2. 17:58
백석, 자야, 그리고 법정스님

 

오늘 법정스님이 입적했다.

그 분의 종교적인 깊이야 소인배인 내가 알기는 어렵지만

국어를 가르치는 나에게는 누구보다도 익숙한 분이라서 가슴 한켠이 쓰렸다.

삶과 죽음은 이미 우리네 소관이 아니지만

마음에 소중한 분들이 한 분씩 떠나간다는 사실이 한없이 쓸쓸했다.

백석, 자야. 법정스님, 길상사가 연결될 수 있는 어휘라는 것에 또다시 쓸쓸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백석의 첫사랑은 통영의 ‘난’이다.

‘난’과의 사랑에 실패한 백석이 서울로 돌아와서 만난 여인이 바로 ‘자야’다.

1940년 만주로 떠났으니 약 3년 정도의 사랑이 백석과 자야가 사랑한 시간이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서 기생이었던 진향(자야)을 만났다.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그는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외적인 도피.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는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그는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그는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를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

그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하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하고 갈등했다.

그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만주로 떠나는데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잊혀져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 문학사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인사가 되고 만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바로 그녀와의 사랑을 노래한 시다.

지금 눈이 내리는 것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생진,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백석의 여인1-자야의 사랑)> 전문)

 

대원각 소유주였던 자야(본명 김영한)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백석이 떠나고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자야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당시 시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마음이 마음으로 달려온다.

욕망이 지배하는 2010년 현재,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할 대화이다.

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법정스님은 오랜 시간 길상사에서 법문을 했고

2010년 3월 11일, 법정스님이 길상사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입적하셨다.

(서울신문 변형 인용)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법정스님, <무소유> 부분)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법정스님 법문 <일기일회> 부분)

 

 

 

아침부터 쏟아지는 댓글에 당황했습니다.

가능하면 답변을 다 해 드리는 편인데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낙서를 아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해인 수녀님의 편지를 드립니다.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

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