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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시인의 고향을 찾아서-경북 문경

김욱진 2021. 1. 16. 14:50

김욱진 시인의 고향을 찾아서-경북 문경

 

내 고향 지보실(知保室)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또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라고 해두자. 고향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면서도, 정작 고향이라는 말을 명확히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 정이 든 곳,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라고 해두자. 이제 환갑진갑이 지나고 직장마저 은퇴하고 보니 고향 언저리 산천이 그림자처럼 달라붙고 어릴 적 불알친구들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남섬부주 동양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259번지에 본적을 둔 안동 김씨 양졸제파 26대손 종갓집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나의 조부까지 대대로 살아온 서중리는 본래 상주군 산북면에 귀속된 지역으로써 밀양박씨, 안동권씨, 안동김씨 등의 세 성씨로 이루어진 집성촌이었다. 마을 이름을 박문(朴門)에서는 서원(書院), 권문(權門)에서는 근암(近巖), 김문(金門)에서는 보가리(保家里)라 각각 별칭(別稱)했다. 이곳은 1895년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됨에 따라 산서면(山西面) 웅창리(熊倉里)와 탑상리(塔上里) 일부를 병합하여 서중리(書中里)라 했다. 어릴 적 나는 종조부 댁인 보가리에 종종 가서 놀다오곤 했다. 이곳엔 유명한 근암서원(近巖書院)이 있어 원촌(院村)이라 불렀다.

   근암서원은 중종 39년(1544) 상주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이 건립한 근암 서당에서 유래한다. 그 뒤 현종 6년(1665)에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을 봉안하여 원(院)이 되고, 동 10년(1669)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추배(追配) 서원으로 선액(宣額), 숙종 28년(1702)에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를 추배, 정조 10년(1786)에 활재(活齋) 이구(李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을 추배(追配)하여 칠현서원(七賢書院)이 되었다가 고종 5년(1864)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된 것을 1974년부터 부설공사를 시작하여 1984년 10월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태어나 자란 곳은 서중리에서 2㎞쯤 떨어진 지보실(知保室)이라는 마을이다. 지보실은 그저 산 좋고 물 맑은 산촌 농경마을이다. 행정구역상 면소재지인 한두리는 대상1리, 지보실과 오미기는 대상2리로 나눠졌다. 그래서 지보실은 아랫한두리라고도 불렀다. 점촌에서 예천 용궁 방면 15리쯤 오다 산양 들머리서 왼손 편 동로 단양 가는 길 죽 따라 진등-봉정-서중리 마을 지나 산북면 소재지 못 미친 서편 관암산(冠巖山) 아래 60여 호 사는 아담한 마을이다. 멀리는 소백산맥에서 뻗은 해발 1000m 이상의 장엄한 대미산 운달산 사불산 등이 첩첩이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뻗어오는 동안 유순해져서 고향마을 언저리 산들은 그렇게 험한 악산도 아니고, 나지막한 동산도 아닌 그저 고만고만한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 넓게 펼쳐진 한두리 들판은 넉넉하고 평화롭다. 황장봉산(黃腸封山)과 천주봉(天柱峰)에서 발원한 동로천(東路川)과 운달산 사불산에서 발원한 산북천(山北川)이 합류하여 흐르는 금천(錦川)은 범람할 정도의 큰 강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뭄에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실개천도 아닌 내인지라 사시사철 어머니 젖줄처럼 흘러가며 한들의 목을 축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산수경이 잘 어우러진 강촌마을 같기도 하고 전원마을 같기도 하다.

   어릴 적 초가 흙집이었던 나의 생가는 사라졌고, 그 터에 누군가 새로 집을 지어서 살고 있다.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내가 고2까지 생활했던 본가가 있다. 그 집 역시 아래채는 없어졌고, 일부 개조한 본채만 남아있다. 현재 집주인은 외지에 나가 있고, 어릴 적 허기 채웠던 종지감 나무 한 그루가 텅 빈 집주인 노릇하고 있고 마당엔 풀이 수북하다. 추수 끝난 늦가을이면 나는 해마다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이었고, 그 지붕 위로 박 넝쿨 기어 올라가 달덩이 같은 박 둥글둥글 낳고 사는 모습 보고 자랐다. 아버지 돌아가시던 중1 때, 그토록 정겹던 초가지붕은 새마을운동 바람에 밀려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그 함석지붕에 올라가 두어 차례 하늘색 페인트칠을 한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현재 그 함석집 바로 위쪽에 오촌 당숙내외분 살고 계신다.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가끔 채널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 채널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묏등에 염소 고삐 풀어놓고

술래잡기하며 뒹굴던 코흘리개 시절로

어머니 손잡고

산비탈 굽이굽이 돌아 외갓집 가는 길

어스름 서리하던 복숭나무 아래로

꽁보리밥 싸가는 게 부끄럽다고

생떼부리며 드러누웠던 골목길로

고주박이 한 짐 걸머진 지게머리

참꽃다발 수북 꽂아 버텨두고

도랑가재 잡아 구워먹던 불알들 곁으로

성황제 지낸 고목 아래 함초롬 밝혀둔

불 종지 몰래 주워와 시렁에 모셔놓고

집안 액운 다 태워달라며

밤새 빌던 정월 대보름 새벽 달빛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 내 맘속의 주파수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행복채널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더러는 녹색 신호등 앞에서

강생이 한 마리가 내 채널을 휙, 돌려놓고 갈 때도 있다

 

-『행복 채널』 전문

 

   마을 입구 왼편에는 오미기, 오른편에는 건넛마을, 그 한가운데 지보실이 위치하고 있다. 정면으로 우뚝 솟은 두꺼비 모양의 장대산과 뱀을 빼닮은 좌측의 배암산(또는 관암산)이 지보실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흡사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조선 11대 왕 중종이 즉위할 무렵, 김해 김씨들이 처음 이곳으로와 살았다고 전한다. 그후 본관을 알 수 없는 천씨들이 얼마간 살다 곧 떠났고, 이어 밀양 박씨와 예천 임씨들이 거주하였다. 특히, ‘박 첨지’라는 분은 동답까지 희사하여 동제사를 모셨다고 하며, 아직도 세 가구의 임씨 문중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 즉위(1600년대 초) 당시, 보가리(현재 서중리)에서 줄곧 대를 이어 살던 안동 김씨 일파가 이곳으로 이주해 집성촌 성격의 세거지를 이루었으며, 학식 높은 몇몇 분이 후학 양성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집을 보존할 줄 안다’는 의미의「知保室」, 지금은 그 후손들 대부분이 객지로 떠나버리고 세 가구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180여 년 전, 왕태에서 개성 고씨들이 건넛마을에 삶의 터전을 잡아 지금껏 문중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고, 이어 인천 채씨 문중이 100여 년 전쯤 마지막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현재 이 마을엔 임진왜란 후 각지에서 들어온 타성(스무 성씨)이 대부분으로 6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보가리 살던 안동김씨 양졸제파가 이주할 무렵에 심은 400년 남짓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마을을 지키고 서있다. 예전부터 세 동네 사람들은 이 당산나무 아래 죽 모여앉아 놀았고, 자연스레 소통의 장이 되었다. 오미기에 살던 임학선의 후손이 분가하여 이곳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대대손손 부귀영화하며 마을을 잘 보존하라는 뜻으로 지보실(知保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보실 아래쪽에 있는 오미기는 신라시대 임씨(任氏) 성을 가진 선비가 개척한 마을이다. 그 후손인 임학선(任學先)은 마을의 형국이 까마귀 혈(穴)이고, 까마귀는 나무 위에 둥지를 튼다 해서 오미기, 오목, 지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임학선은 효행이 지극하여 임 효자로 알려져 있다. 어느 해 겨울 친환으로 사경에 이른 부친이 잉어가 먹고 싶다 하여 잉어를 구하러 다니는데 마을 어귀 논에서 한 마리의 잉어가 불쑥 솟아 이것을 잡아 부친을 봉양하여 병이 나았다고 그 논을 잉어배미라 부르며, 이듬해 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 해서 엄동설한에 딸기를 찾아다니던 중 어느 골짜기 눈 위에 딸기가 뭉실뭉실 솟아 있었다 하여 딸기밭골이라 부르고, 또한 지금의 진등(봉정)과 잔두리(존도) 사이에 고개를 작천고개라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이곳이 도적떼가 숨어있는 도적골이었다. 도적들도 임 효자를 공경하여 한밤중에 이곳을 지나가도 아무 탈 없이 통과시켰다고 한다. 임 효자가 상을 당하여 빈소를 차린 곳이라 해서 빈소골, 사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효자문이라 칭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저 멀리 장대산 내려다보이는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 왼편에는 관암산(冠巖産) 황새바위가 날아오를 듯 날개를 웅크리고 있다. 운달산에서 발원된 산북천(山北川)과 동로에서 남류하는 금천(錦川)이 대하리에서 합류한 뒤 산북, 산양 양면을 남북으로 관류하여 영순면 달지리(達池里) 삼강(三江)에서 낙동강(洛東江)으로 흘러든다. 눈 아래 펼쳐진 넓고 기름진 들판은 농사짓고 살기에 좋았고, 각처 옛 선비들은 금천을 따라 유유자적 거닐고 다녔다 한다. 초등학교 다닐 적 나는 장학금 조로 염소 한 마리를 받은 적 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염소 고삐 잡고 풀 뜯어먹는 흉내를 내며 염소랑 놀던 시절이 있었다. 훗날 그 얘기 고대로 받아 적은 시 한 편을 읽고 가자.

 

초등학교 때 나는 염소 동아리 반장을 한 적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로 장학생인 셈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나는 장학금 턱으로 어린 암염소 한 마리를 받았다

소 키우는 집이 엄청 부러웠던 그 시절

학교만 갔다 오면

나는 염소 고삐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염소가 자라 이듬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 수놈은 팔아 중학교 입학금 마련하고

암놈은 건넛집 할머니랑 사는 여자아이에게 분양했다

희망 사다리 오른 그 아이도

어미 염소 되도록 길러 새끼 낳으면

릴레이 식으로 건네주는 염소 동아리

염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 낳고 낳아

육십여 호 되는 한두레마을은

어느새 염소 한 마리 없는 집이 없었다

뿔 맞대고 티격태격하던 이웃들

염소 교배시킨 인연으로 부부 되고 사돈 맺는

고삐 풀린 그런 날 더러 있었는데

외박 나온 염소들도 마냥

하늘땅 치받으며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한두레마을 염소 이야기』 전문

 

   여름이면 불알친구들이랑 금천 마당바위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논에 가서 썰매를 타고 팽이치기도 하며 놀던 기억 아련히 떠오른다. 방학 때는 매일같이 금샛골 재 두 세 고개 넘어가 땔감을 해왔고, 가끔은 고지박이 한 짐 버텨두고 도랑가 가재도 잡아 구워먹었다. 거의 반평생을 타향에서 살아온 나는 아직도 어릴 적 길들여진 고향말투를 가끔 툭툭 내뱉을 때가 있다. 밥 먹어여, 왜 그래여… 어눌하게 여여, 하다 보면,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이가 더러 있었다. 나는 그냥 문경이라고 답했다. 아! 문경 새재, 박달나무, 문경 탄광… 심지어 문경 사과까지 거들먹거리며 아는 척했고, 그러면서 문경 얘기로 한참 빠져들어 친근감마저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고향 범주는 언연 중에 넓어져 문경으로 굳어져버린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고향에 대한 나의 시상도 문경 새재, 문경 탄광 등을 소재로 한 시가 두어 편 발표된 적 있는데, 여기서는 문경석탄박물관에서 받아 적은 시 한 편을 읽고 가기로 하자.

 

두 하늘을 모시고 사는 형이 있었다

파란 새벽하늘 쳐다보고 갱 속으로 들어가

숯검댕이 하늘나라 투명인간 되어버린 형, 만나러 갔다

늦가을 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갑반 일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검댕이들은 다

나의 형 같아 보였다, 보릿고개 시절

온몸에 깜부기 칠하고 나를 폭삭 속여먹었던 형

엄마한테 검정 고무신 사달라고 떼쓰던 그 형아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막장까지 떠밀려온 형들의 눈빛이 모도

지금, 여기, 나는 없었다

막장 한 모퉁이 꼬부리고 앉아

시시만큼 싸 온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면서도

은성 주포집 빈대떡 두루치기 한 접시 시켜놓고

술잔을 부딪치며 먼저 떠난 이의 이름 되뇌면서도

갱 입구 쓸쓸히 서 있는 동상을 바라보면서도

시커먼 석탄 가루 뒤집어쓴 형의 마음은 늘 새카맣게 타들었을 터

어렵사리 대학 간 동생 고시 패스만 하면

팔자가 늘어질 끼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형

 달에 한 번쯤 광산 이발관 들러 밑도리도 하고

사택 공동 목욕탕에서만 항상 목간하던 형

간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은성 식육점 돼지고기 두어 근

새마을 구판장 소고기라면 대여섯 봉다리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형

목소리가 고대로 살아남아 있는 문경 석탄박물관

단칸방 사택에는 아직도 라면땅 사 오는 형을 기다리며

나의 조카 질녀들은 딱지치기하고 있다

연탄불 피워놓은 따듯한 방에서 내가 편히 잠들었던 그 시간

형은 월남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었다

 

-『막장에서 만난 형』 전문

 

   이제 생물학적 고향인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를 좀 해보기로 하자. 처녀 공출 바람에 열여섯 어린 나에 가문만 보고 시집온 어머니는 10년 넘도록 손을 잇지 못한 죄스러움에 30리 밖 절까지 밤낮 걸어 다니며 득남불공을 드렸다. 김룡사 나은전에서 3년 불공 끝에 서른이 다 되어서야 어렵사리 나를 낳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따라 김룡사에 자주 갔었고, 스님들 말씀을 자연스레 많이 듣고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절집에서 주워 담은 말들이 내겐 참으로 편하게 와 닿는다. 묵언 속에서 오가는 스님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틈틈이 절도 많이 하고 염불도 외고 때로는 참선 흉내도 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시도 때도 없이 묻고 살았다. 되돌아보면, 그게 다 지금의 나의 시 종자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룡사(金龍寺)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 말사이다. 588년(진평왕 10) 조사 운달(雲達)이 창건하여 운봉사(雲峰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사적은 전래되지 않고 있다. 1624년(인조 2) 혜총이 중창하였으나, 1642년(인조 20)에 소실되어 1649년(인조 27) 의윤(義允)·무진(無盡)·태휴(太休) 등이 중수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절 이름을 김룡사라 한 것은 옛날 문희(聞喜 : 지금의 聞慶)부사로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관(官)에 죄를 짓고 도망쳐 이 산에 숨었다가 우연히 신녀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용(龍)이란 아들을 낳았다. 가운이 또한 부유해져 사람들이 김씨 어른(金長者)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큰 비바람이 분 뒤 그 처자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며, 지금 그 옛 터와 섬돌이 절의 서쪽에 남아있어 절 이름을 김룡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선대(金仙臺)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 따서 금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교통의 불편으로 옛 말사였던 직지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1940년 요사와 종루를 개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김룡사 일원의 계곡을 운달 계곡이라 하는데, 맑은 물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져 ‘문경 8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응진전(應眞殿)·금륜전(金輪殿)·명부전(冥府殿)·상원전(上院殿)·영산전(靈山殿)·원통전(圓通殿)·첨성각·범종각·수월당(水月堂)·만월당(滿月堂)·연하당·일주문(一柱門)·천왕문·요사 등 전각 48동이 있다. 일주문에는 문 윗부분에 ‘紅霞門(홍하문)’, 아랫부분에 ‘雲達山 金龍寺(운달산 김룡사)’라고 쓴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고, 대웅전에는 1644년(인조 22) 조성된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持地) 보살상을 묘사한 삼장탱화(三藏幀畫)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다시 지은 건물로서, 16나한상과 나한도가 모셔져 있다. 절 입구에서 보면 정면에 ‘慶興講院(경흥강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300인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온돌방으로서, 자연 지층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축한 것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시대를 알 수 없는 석조 약사여래입상과,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맷돌·떡시루·쇠북·범종, 지옥의 염라왕청에서 죽은 이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업이 나타난다는 업경대(業鏡臺) 등이 사물(寺物)로서 남아 있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화장암(華藏庵)·양진암(養眞庵)·금선대(金仙臺)·토굴 등이 있다. 양진암은 1658년(효종 9) 설잠(雪岑)이 창건하였으나, 1664년에 불탄 뒤 1749년(영조 25) 환월(幻月)이 중건하였다. 그 뒤 1769년 무영이, 1825년 해운과 경봉이, 1840년 정봉이, 1929년 인택이 각각 중수하였다. 대성암은 1800년(정조 24) 영월(潁月)이 청하당을 옮겨 창건하였고, 1886년 혼성(渾性)이 중수하였다. 현재는 비구니스님들 수도처로서, 이곳에는 고승의 진영이 담긴 영정과 동물그림의 병풍 등 많은 현판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전설로는 산 너머 대승사에 불이 났을 때, 일심으로 염불하면서 바가지에 시냇물을 퍼서 불을 끈 동승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곧바로 대승사(大乘寺)로 가보자. 대승사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에 있는 절이다. 이 절 역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 말사다. 사불산의 산마루에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으며,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반야경』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僧堂)·동상실(東上室)·관음전·조전·미륵전·중실(中室)·시왕전(十王殿)·향로전(香爐殿)·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침계당(枕溪堂)·금당(金堂)·영자전(影子殿)·향적전(香積殿)·응향전(凝香殿)·나한전(羅漢殿)·청심전(淸心殿) 등을 신축하였다. 이 중 금당은 1692년(숙종 18)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1727년(영조 3) 종각을 단장하였고, 1730년 금강문(金剛門)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해 천왕문과 금강문·일주문을 단장하였다. 그 때의 산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 9암이 있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 복장(腹藏)에서 사리(舍利) 1과와, 신룡(神龍) 1년(705) 금으로 쓴『화엄경』7권이 나왔다.

   1862년(철종 13) 명부전(冥府殿)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취월(就越)·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 누각 등을 건립하였다. 1872년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 30여 칸을 신축하였다. 1899년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念佛堂)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하였으며, 환경(幻鏡)·화응(華應)·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 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하였다.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들이 정진할 수 없었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만일회(雙蓮庵萬日會)를 개설하였다. 1956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나한전·시왕전·선원·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윤필암·상적암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75호인 대승사목각탱화부관계문서 4매, 보물 제991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사적비와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금자『화엄경』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있으며, 창건설화에 얽힌 사불암과 그 아래에 세워진 대웅전은 조화를 이루어 신비감을 준다. 내 고향 문경…박달나무 눈 참, 밝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한 그루

내 방 귀퉁이 옷걸이로 거듭났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듣고 살다

이젠 내 잔소리까지 듣고 산다

나무가 옷 갈아입었다

옷이 나와 옷걸이 번갈아 입었다

낮에는 나를 입고

밤에는 옷걸이를 입었다

내가 옷걸이 옷을 입고

옷걸이가 내 옷을 입어도

옷은 걸림이 없다

팔다리 잘린 옷걸이

옷 걸쳐 입을 때마다

나의 팔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해지고 터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렸다

나무가 옷을 입었다

옷이 나를 걸쳐 입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렸다

품도 소매도 없는 옷걸이에

어깨만 걸친 옷 한 벌 걸렸다

눈 밝은 달달박박 옷 갈아입은 듯

박달이 입은 옷, 걸림이 없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경을 듣는(聞經) 새재의, 이 아침

 

-『박달나무 눈 참, 밝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