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해설

김욱진 시집『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김상환(시인, 문학평론가)

김욱진 2020. 10. 24. 23:59

(작품론)

 

김욱진 시집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김상환

 

김욱진 시인은 최근 네 번째 시집수상한 시국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의 시에는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재미와 힘이 있다. 일상에서 비롯된 그것은 말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주어지는 알레고리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자아와 타자에 대한 시편의 구성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고 평이하지만 곱씹을수록 의미를 더한다. 참나의 문제가 뒷받침된 때문이다. 하여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거울 보는 새)라는 질문은 시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도 통한다. 종교적이라 하기엔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라 하기엔 종교적인 그의 시는 내 안의 나에 대한 목소리이자 그림자 놀이다. 시집의 [4]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다. “김욱진의 시는 를 의두疑頭로 들고 나오면서도 크게 무겁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으며 해학과 기지機智가 넘친다. 경험의 디테일에 기반한 그의 시는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가도 주저하게 되는 것은, 이완의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그만의 의도와 행간의 의미 때문이다. 대상을 휘감거나 일거에 메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언롱言弄과 자재自在한 모습은 환력을 넘기고서다. 노모를 잃고 천길 벼랑 끝에 선 시인은 이제 한겨울 밭모퉁이() 엉거주춤 서 있는 바람처럼, 바람 든 무처럼 무의 마음과 눈을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김욱진의 새 시집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를 중심으로 텍스트 분석을 시도한다.

 

하나.

 

섣달 그믐밤 연탄 한 장 피워놓고

골방에 누워 감 홍시 하나 물컹 삼켰더니

고놈의 씨가 목구멍에 걸려

넘기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렸다

것도 모르고 날로 꼴깍 삼킨 시

명치에 딱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고놈의 시를 살려봐야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새벽녘 안도현 씨가 씨익 웃으며 찾아와

감이 익으면

삼킬 것도 토할 것도 없이

다 시가 된다고 그러지 뭔가

씨가 시가 되는 건 감이라고

죽은 시를 살리는 것도 감

날로 삼킨 시를 푹 삭히는 것도 감

뭣이 죽은 듯 살아 있는 감이라고

설날 아침

제상 맨 앞줄 터줏대감처럼 앉아 절 받는 감

씨가 그랬다

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

씨가 뭔 줄도 모르고 시집와서 그냥 씨 뿌리고 산 것도 감이라고

지방문에 걸렸다, 그게 다 시가 되어

불씨처럼 화끈 달아오르면

감은 요리조리 데치고 볶고 삶고

그걸, 다 우려낸 게 시 아니 씨라고 그러지 뭔가

!

ㅡ「/, !전문

 

시는 씨앗이다. 씨앗은 밑씨가 발달한 것으로 새순과 줄기와 열매의 처음이다. 이런 생명체의 유기체적 속성과 메카니즘은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충동-어떤 것은 정서나 관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존 휠록)이거나 ’(또는, 胎兒embryo; T.S.엘리엇)에 해당한다. 시의 착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김욱진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착상은 유다른 데가 있다. 인용시의 시와 씨-·의 관계 설정이 그러하다. 한해가 끝날 무렵 골방에 누워 먹은 홍시가 그만 문제를 일으킨다. 씨가 목구멍에 걸린 것이다. 문제의 감-씨가 시가 된 것이다. 먹는 감과 느끼는 감의 언어유희pun이다. 감의 씨와 씨-시의 감을 잇는(“씨가 시가 되는 건 감”) 말의 감각은 특출한 데가 있다. 이러한 감()이 죽은 시도 살릴 만큼 중요하지만, 더욱이 중요한 것은 삭힌 말이다. 충분히 발효시키지 않고 그냥 내뱉는 말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거나 호감을 갖기 어렵다. 후반부에서 씨-시의 상상력은 제의祭儀 또는 가계-족보의 성(“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로 확장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 지방문을 불사를 때도 불씨는 씨의 한몫을 차지한다. 죽은 시와 말, 삶을 되살리는 데는 불()만한 게 없다. 그 불로 음식을 요리하고 장만하여 먹고, 마지막 찻잎을 우려낸맛이란? 시는 말과 삶의 씨앗이 자라 한 그루 ()나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름다운 감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씨앗은 생명의 노래이며, 노래의 생명이다.

 

두울.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ㅡ「여시아문如是我聞전문

 

주병율의 문학TV에 소개되어 이렇다할 화제를 불러 모은 이 시의 핵심은나는 누구인가하는 점이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앞의/, !의 경우처럼 재미있고 유니크하다. 시제로 내세운 여시아문如是我聞’(또는, 아문여시我聞如是, 문여시聞如是. evam mayā śrutam)은 부처님의 말씀을 아난 자신이 이렇게 들었다. 아니, 이와 같이 나에게 들렸다는 뜻이다. 이는 아난 자신의 의지로 들은 게 아니라, 붓다가 말한 대로 들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체의 소멸로 인한 무아의 경지가 불가에서 말하는 선수행이며, 존재의 들음-들림이다. 시인은 이런 주제와 주제의 깊이에 대해 결코 드라이하거나 무겁게 다가가지 않고 일상의 체험에 기반해 접근한다.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가 생각해 낸 것은 주변의 무성한 잡초에 대해서다. ()의 의미는 물론,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대상인가, 하는 점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잡이다(“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은 곧 화엄華嚴의 세계다. “흙 한 무더기공기 한 숨”, “햇빛 한 줌물 한 모금은 모두 무심無心과 허-공의 주체이고, 타자의 윤리이며, 보살도의 정신이다.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에고ego의 나는 이제 물과 풀, 흙과 공기, 햇빛이 없이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그들이야말로 참주인이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더해주는 진리의 주체임을 안다. “우주 한 모퉁이가 갑자기 환해진다.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수상한 시국·3).

 

세엣.

 

방 한 모퉁이 책상 위엔

한 열흘 전쯤 고향 집에서 주워 온

모과 한 개 뎅그러니 놓여 있다
낯설이 해서 그런지 얼굴색이 노래지고

주근깨 같은 까만 점도 후벼 파주고 싶을 만큼 생겼다

그 단새 구멍 두어 군데 숭숭 나 있는 흠집
나의 귀지 같은 더께 덕지덕지 앉은 구멍 속 한참 들여다본다

흠집은 암갈색으로 점점이 번지는 중이다
더군다나 몸통은 밀가루 반죽 짓이겨놓은 듯 울퉁불퉁하다
과일 망신 다 시킨다는 그 모과

온몸 쥐어짠 기름 반들반들 내뿜으며 웅숭깊은 향 풍긴다

, 저 향수 속으로 나를 찾아 나서면

언제쯤 그곳에 가닿을 수 있을까

못생긴 인형처럼 앙증맞은 한 개구쟁이가

내 맘을 온통 다 파먹어 들고 있다

-모과에 대한 단상전문

 

서시 격에 해당하는 이 시는 대상(“모과”)을 바라보는 시선과, 시상의 디테일한 전개 방식이 돋보인다. 시의 아름다움과 비밀은 향과 기에 있다. 그 보이지 않는 향-기는 보이는 것에 있다. “고향 집에서 주워 온/ 모과하나가 이 시의 중심 모티프라면,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에서처럼 모과는 못생긴 인형이다. “주근깨귀지”, “흠집투성이와 개구쟁이에 비견된다. 그러나 암갈색의 모과 구멍에는 알 수 없는, 그윽한 향이 배어 있다. 모과향과 고향의 울림. 낡고 오래된 고향의 웅숭깊은 향은 어디서 오는가? 지혜로운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고향의) 맛을 아는sapere 사람이다. 모과의 외양에 비해 분홍빛의 꽃은 아름답고 순결하다. 흰빛이 섞인 붉은빛의 분홍은 유혹-매혹이란 꽃말을 뒷받침한다. 모과가 내 마음을 앗아간 데는 (삶의 부정과) 고통을 승화시키는 데 있다. 오시프 만델스탐의 말처럼, 시인은 공기를 훔치는 사람이다. 향이 승화의 다른 말이라면, 그것은 공기의 이미지-상상력이다. 공기의 시학이다. 하여 모과 없는 향, 향이 없는 모과는 이제 상정할 수가 없다. 시인은 푼쿠툼punctum이란 상처, 즉 구멍과 흠집을 통해 양자를 잇는다. 이음의 시인은 시와 모과라는 향을 알고, 음미하는 자이다. 우리는 언제쯤 그곳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네엣.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 한 줄 적힌 수돗가 거울 앞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거울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갔다

안팎 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ㅡ「거울 보는 새전문

 

대상을 관-찰하는 능력과 말의 운용은 김욱진 시인의 특장에 속한다. 하여 이 시를 읽는 일차적인 즐거움은 말에 있다(“나는 새다/ 나는 새다”, “나는/ 새는”). 말의 재치와 순발력은 물론, 중층적 의미를 통한 리듬의 효과마저 누리고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은 적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묻다-보다-돌아가다의 서술어는 그런 긴장감을 나타내는 사유의 방편이다. 시는 마음의 빛이자 거울이다. 그 거울은 나를 비춘다. 이런 마음의 거울을 매개로 하여 나와 새의 관계를 보자. “거울()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보는 새,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는 나. 둘의 대비에서 는 동일성과 차이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 참나가 거울을 직관하는 참새의 모습이라면, 새는 우리가 잡거나 알려고 하면 이미 허공 속으로 날아가고 없다. 그 허공은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사이 존재다.--거울-의 등가 관계에서 의 고어古語에 있다. 새와 해는 모두 빛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빛은 내 안의 나를 거울처럼 비춘다. 모든 분리된 것을 이어주고 감춰진 것을 드러나게 한다. 허공 속으로 새는 돌아간다. 사라져간다. “인류는 사라짐의 방식을 발명한 유일한 종이며, 어쩌면 사라짐의 예술이다”(장 보드리야르,사라짐에 대하여). 거울과 새, 그리고 나와 시는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섯.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님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입마개하고 여기 갇혀 있게

이제 난 쑥이나 뜯으러 갈란다, 하시고는

화장실 들어가 온 바짓가랑이에다 똥오줌 술술 다 싸 붙이고서

, 속이 시원하다 그러시지 뭔가

노모 일기·7전문

 

생전 어머니와의 대화와 코로나19’의 현실이 뒷받침된 이 시는 내러티브의 기법에다 방언의 활용, 경험의 구체성으로 인해 실감이 난. 배경은 비슬산 기슭의 양동 마을이다. ‘기슭양동이란 말에는 음-양의 새로움과 깊이가 있다. 유기체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된 상태를 병이라 한다면, 어머니는 벌써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한다. 게다가 전국은 지금 코로나19로 비상이 걸린 상태다. 하지만 그 무서운 코로나도 어머니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그 순간, 어머니의 일성, 속이 시원하다는 말은 그늘이 볕이 된 형국이다. 배설이다. 카타르시스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본래 의학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불쾌한 정서인 공포와 연민을 제거하여 정신적 정화 작용을 가져옴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자는 침대 위에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이고, 영어의 병disease안락하지 않은것을 말한다. 즉 쾌가 아닌 불쾌의 감정이다. 이 시에서 유일한 희망의 분위기와 정서를 나타내는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라는 구절도, 실은 불쾌의 기분을 고조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한다.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은 어머니의 병도 의사는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고 한다. 쑥의 비밀이다. 기슭-양동의 마을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일이다.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같은 인간 실존에게 병이란 무엇인가, 왜 병인가? 이는 곧 시란 무엇인가, 왜 시인가, 하는 문제와 맞닥뜨려진다. 생은 병이다(“생병” ). 누가 이 고통과 이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시는 그 고통의 승화, 이별이라는 만남이다. 묘약이다.

 

김욱진은 시답잖은”(수상한 시국자서) 시인을 자처하고 나선다. 이 경우 시답잖은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이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발견과 깊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말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접근으로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언어와 가치에 무게를 두는 그의 언어에는 무엇보다 대지와 사회 현실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궁극에는 지금-여기‘()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과 성찰의 문제에 닿아 있다. 불교에 남다른 관심과 조예가 있는 그는 일상과 시, 시와 나가 더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누구든 무엇이든 그의 시답잖은 언어의 포충망에 걸려들기만 하면 여지없이 해체되어 재구축된다. 그것은 시적 진리와 숨은 실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런 점에서 김욱진의 이번 새 시집은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

 

 

약력

19818월간문학신인작품상()으로 등단/ 시집영혼의 닻/ 1993년 여름호문화비평

한 내면주의자에 대한 비망록적 글쓰기-이가림론를 발표함으로써 비평활동 시작/ 대구과정사상

연구소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