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해설

나무의자 / 김욱진(2021대구문학 4월호 월평)

김욱진 2021. 4. 9. 17:33

나무의자

김욱진

 

 

물속에 가라앉은 나무의자 하나

미라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못 한 모퉁이 조용히 누워있다

지나가다 언뜻 보면

평생 누군가의 엉덩이 치받들고

꼿꼿이 앉아 등받이 노릇만 하고 살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노후를 편히 쉬는 듯한 모양새다

그 자세가 부러웠던지

물오리 떼 간간이 찾아와

근심 풀듯 물갈퀴 풀어놓고 앉아

쉬, 하다 가고

그 소문 들은 물고기들도

어항 드나들듯

시시때때로 와서 쉬었다 가는데, 저 나

무의 자는 더 이상

나무도 아니고, 의자도 아니다

앉으나 누우나, 성당

못 오가는 사람들 쉼터 되어주다

못 속으로 돌아가

못 다 둘러빠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 걸머지고 가는 나

무의 자는

나무로 왔다 의자로 살다

못으로 돌아간 성자

-김욱진,「나무의자」전부

 

지금 시인의 눈은 성당못 한켠에 가라앉은 나무의자를 향해 있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것은 "미라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못 한 모퉁이(에) 조용히 누워있다". 죽은 게 아니다. 시인의 눈에 비친 나무의자는 누군가의 일과 휴식을 위해 등받이 노릇을 해오다가, "이제(는)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노후를 편히 쉬는 듯한 모양새다". 그야말로 낡고 무용지물이 되어 사용자로 하여금 폐기처분된 의자가 아니라, 시인에 의해 새로이 생명(성)을 부여받게 된 나무의자는 근처 물오리떼와 물고기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보살핌과 모심의 윤리에 관한 한, 나무의자는 더 이상 나무가, 의자가 아니다. '나'는 무의자無衣子("무의 자"대신 '무의자'가 좋을 듯). 번뇌에 얽매인 경계를 멀리 벗어나 어떠한 속박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을 무의(無依, anālambya)라 한다면, 무의無依나 무의無衣는 다르지 않을 터. 빈 몸으로 왔다 빈 몸으로 가는 우리는, 무無의 자者는 따지고보면 모두 무의자가 아니던가. 상생의 순환 원리에 따라 수생목水生木이 그렇듯, 물은 의자를 죽임이 아니라 살림으로 기능해 있다. 후반부 말미에 '못'의 양가적(부사, 명사) 기능, 리듬과 알레고리, 시행 걸침enjambment은 읽는 재미와 의미를 더한다. 삶이란 "십자가(를) 걸머지고 가는 나"와, 나의 죄를 대신해 죽음과 부활로써 인류를 구원한 예수, 나무의자는 모두 "나무로 왔다 의자로 살다/ 못으로 돌아간 성자"가 아닐까. 보다voir와 듣다écouter는 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론(조재룡,『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시학, 번역, 주체』)이다. 그런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나무의자의 성성聖性을 알 수 있다. 왕래(왔다-살다-돌아가다)에 따른 삶의 순환과 실재를 느낄 수 있다.

 

(2021 대구문학 4월호 월평-김상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