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스크랩] 시집보내다 / 오탁번

김욱진 2011. 2. 1. 08:47

시집보내다 /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 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 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오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 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수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난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 줬나?
줄잡아 몇 만평도 넘을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는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김지헌 시집 보냈나?
―서석화 시집 보냈나?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유심 2011년1,2월호>에서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 시집으로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소설집으로 《저녁연기》 《겨울의 꿈은 날줄 모른다》 《순은(純銀)의 아침》 등이 있음. 동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김삿갓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글쓴이 : 서봉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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