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시는 왜 필요한가
김 욱진
1. 시라는 산의 능선은 천천히 걸어가도 된다. 그러나 능선을 걸어갈 때 그 마음만은 무심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러면 많은 하고 싶은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떠오를 것이다.
2. 시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발견하기 위한 마음의 움직임이 발견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3. 시는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나도 모르게 감추어놓았던 나의 인생의 일들을 다시 찾는데서 시작된다.
4. 시는 자신의 내부에서 구해야 한다. 그 내부를 위해 외부가 존재할 뿐, 만일 외부만 있으면 종이인형에서 생명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5. '노력이 소질이며, 연습의 양이 질'이라는 말은 시 쓰기에 있어서도 해당된다.
1) 삶의 고통을 위로한다
닭 잡았다!
5월 바람은 밀밭을 잘 빗어 넘긴다
산북초등학교 88주년 총동창회 막이 오르고
달리는 닭을 잡는 시합을 한다
그늘만 찾던 48기 씨암탉들도 훌훌 홰를 치며
기세등등 벼르는 입술이 닭볏이다
닭장에서 풀려 나온 것이야 너나 나나 마찬가지지만
팔도 없는 너희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
병아리도 웃을 일이지
볏 바짝 세운 닭이 궁뎅이 흔들며 뛴다
뒤뚱뒤뚱 걸음마 배우는 폐계,
애기 업은 영계, 술 취한 수탉, 허리 굽은 암탉들이
다닥다닥 뒤엉킨 운동장
덥석덥석 손목 잡히고 풀어지는데
닭 잡았다! 벼슬 했다! 가문의 영광이다!
벼슬 앞에 큰 소리 칠 수 있는 벼슬이여
뛰면서도 쉴 수 있는 홀가분함이여
'더 낮게 더 가까이''더 높게 더 빠르게'
관암산 꼭대기까지 헐레헐레 달려갔다
쉬엄쉬엄 걸어오는 교가
푸르고 푸른 총동창회
나의 일이다
천안함 침몰
누가 잠든 바다를 건드렸다
길은 무너지고 배는 휘청거렸다
선수와 선미는 이산가족 되어 흩어졌고
바다는 그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육지는 섬이 되어 울렁거렸다
귀신 잡는다는 대한민국 해병,
그대들은 백령도 속살 후비며 어뢰비늘 벗기고 있는가
숨죽인 전우들의 전화번호 찾고 있는가
그대들은 누구의 명령에 복종할 참인가
‘너의이ㅁㅜ수행끄ㅌ…깅급암호버트ㄴㅜ르고
…신속ㅎ바ㄷㅏ궁전빠ㅈㅕ나와가ㅂ판으로복ㄱㅟ하라…’
들리지 않는가, 어미의 사막 같은 통곡
보이지 않는가, 아내의 피멍든 문자메시지
아른거리지 않는가, 산산이 쏟아지는 눈빛 눈빛들
아, 그 어디선가 부릅뜬 채 보초 서있을 숨결이여
애꿎은 궁지에서
새떼처럼 비상하라, 푸른 영혼들이여
이제 편안함으로 갈아타고
넘실넘실 노 저어 오소서
2)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발견한다
4월, 우포늪
떠날 채비 서두르라는 푸른 함성이 온 늪에 깔린다
칼바람에도 서걱서걱 오만을 떨던 갈대가 입덧 같은 울렁증으로 비틀거린다
언덕배기 서서 정신을 놓아버린 왕버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눈 버쩍 뜬다
제 팔다리로 흐르는 물소리에 버둥대는 낡은 생각들
어디로, 어디로 숨겨야 할까?
더 채워야 할 것이 남았는지 철새들 날개 짓은 굼뜨기만 하다
물러선다는 것이
밀려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일까
문득, 내 발밑에서 낄낄거리는 자운영 웃음소리
혁명일까
쿠데타일까
가을죽비
나뭇가지가 연신
초승달 어깨를 후려친다
삼보일배 하는
낙엽들의 행렬이 장엄하다
탁발 나선 갈바람의
바랑 속으로
바르르 떨고 있는
밤하늘의 별들마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빈집
있다, 내게는 집이 여러 채 있다
머잖아 누군가에게 물려줄 우주宇宙가
내 집이라는 사실, 아직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
대신, 나의 몸집 속에 남은
쪽방 몇 칸과 시상에 번진 피 한 방울이나마 나눠 가져라
사랑의 바이러스가 속살처럼 되살아나는 그 순간까지
제일 꼭대기 층엔 골방 둘
그 아래층은 오감五感이 자동으로 감지되는
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거기서 숨 한번 길게 들어 쉬고 내려서면
마주 보고 마음 나누는 방이 둘
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랜 똥집
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있다
빈집,
문풍지 같은 기억 꿀꺽 집어삼킬 바람 오기 전에
불쏘시개 할 솔가지나 몇 주워 와
군불 그득 지펴 두고
싸늘해오는 나를 가만 들여다보라, 잠시나마
없다, 그림자마저 없다
3)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학교 쓰레기장으로 출근하는 최씨 노부부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각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교 쓰레기장으로 출근하는 최씨 노부부
리어카에 김밥 두어줄 싣고
교문 환히 들어서는 늦깎이 학생부부
누구도 반갑게 맞아주는 이 없지만
교실복도까지 살몃 걸어 들어와
간간이 수업 엿듣고 가는 비둘기 한 쌍처럼
운동장 한 모퉁이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행복을 주워담는 최씨 노부부
정오 무렵이면
허기진 리어카도 어느새
가득 차오른 폐휴지 더미로 배가 부르다
6월의 합창
저녁상을 물리고 마당 한구석 툇마루에 나와 앉아
건너편 논배미 물끄러미 바라본다
못자리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모들이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처럼
물속에 발 담근 채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올챙이들도
지금쯤은
막둥이 같은 꼬리 애써 지우며
두 발 다소곳 내밀었을 것이다
초여름 밤 특별공연 시간을 알리듯
창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 녀석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소리
그 소리에 맞춰
개구리들은 일제히 합창을 하고
어느 새
야외 관중석엔 별빛 가득 내려와 앉는다
인연
몇 해 전
때 아닌 폭설이 내린 어느 봄날 오후
학교 간 아들놈 마중 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운기 바퀴자국 꽉 물고
떨며 누워있는 어린 나무 한 그루 만났지
어디론가 실려 가다
먼 산을 보았는지, 그만
미끄러져 만신창이가 된 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눈빛이었어
저 홀로
험한 세상 헤치며 사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성도 이름도 모르는 그 놈의 뿌리만 믿고
내 뜰 한 구석을 비워주었지
상냥한 햇살에 기대어
졸기만 하던 그 놈은
꿈속에서
‘내가 누구냐’고 외쳐댔어
부러진 뼈마디에 피가 돌고
속살 가득 차오르는 순간까지
꼬박 삼 년이 지나서야
말문을 연 듯
어디선가 날아온
벌 나비 떼와 입맞춤하였어
올 가을엔
석류나무 마음자리 한 구석에
내가 세 들어 살지
4)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게
가랑이 쩍 벌리고
가파른 언덕배기 홀로서는 법
네게 배웠지
저보다 무거운 짐 걸머지고
가볍게 버티는 법
네게 배웠지
술 건하게 취한 섣달그믐밤
불빛 나부대는 도심 한복판에서
지게막대기 바짝 세우고
오줌 휘갈기는 법
네게 몰래 배웠지
눈
녹는다고 가볍게 보지마라
누가 저 용광로 속에 들어가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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