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스크랩] 녹슨 도끼의 시 (외 2편)/ 손택수

김욱진 2014. 9. 19. 12:54

녹슨 도끼의 시 (외 2편)

 

   손택수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텅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을 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 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 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묵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

뒤꿈치 굳은살 같은 날들 먼지 비듬이라도 날리면

온몸이 근질거려 번쩍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고 싶은 도끼

 

 

 

수묵의 사랑

 

 

 

수묵은 번진다

너와 나를 이으며,

누군들 수묵의 생을 살고 싶지 않을까만

번짐에는 망설임이 있다

주저함이 있다

네가 곧 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경계를 넘어가면서도 수묵은

숫저운 성격, 물과 몸을 섞던

첫마음 그대로 저를 풀어헤치긴 하였으나

이대로 굳어질 순 없지

설렘을 잃어버릴 순 없지

부끄러움을 잃지 않고 희부연히 가릴 줄 아는,

그로부터 아득함이 생겼다면 어떨까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빛깔,

한 몸이 되어서도 까마득

먹향을 품은 그대로 술렁이고 있는

수묵은 번진다 더듬

더듬 몇백년째 네게로

가고 있는 중이다

 

 

 

손바닥을 파다

 

 

 

꽃에 물을 줘야 하는데 물통이 없다

접시꽃이라도 꺾어볼까 하다가

두 손을 모아보기로 한다

손가락 사이 틈을 오므리니

통꽃처럼

손바닥이 깊어진다

더는 낮아질 수 없을 것 같던 바닥이

움푹하게 팬다

그 속에 못물을 퍼 담으니

못물 속 담겨 있던 구름과

낮달이 송사리처럼 들어온다

금이 간 항아리의 새는 물을 막으려

내가 틈을 바짝 조이면,

물은 또 틈을 벌려

새기만 한다

나는 물 한방울 앞에서 모처럼 공손해져

연못 앞에서 자꾸 허리를 숙인다

이렇게 한모금의 물을 들고 가다보면

쥐는 것이 아니라 벌어지는 것이,

너무 벌어지기보단 살짝 오므려지는 것이

꽃에게로 가는 길인 걸 알겠다

우물을 파듯 손바닥을 판다

둑을 넘칠 듯 찰랑거리는 물

 

 

 

                        —시집『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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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1998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당선.시집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나무의 수사학』.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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