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당신의 날씨」
김근, 「당신의 날씨」
돌아누운 뒤통수 점점 커다래지는 그늘 그 그늘 안으로
손을 뻗다 뻗다 닿을 수는 전혀 없어 나 또한 돌아누운 적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출 수 없어 나 또한 그만 눈 감은 적 있다
멀리 세월을 에돌아 어디서 차고 매운 바람 냄새 훅 끼쳐올 때
낡은 거울의 먼지 얼룩쯤에서 울고 있다고 당신의 기별은 오고
갑작스러운 추위의 무늬를 헤아려 되비추는 일마저 흐려진 아침
하얗게 서리 앉은 풀들의 피부에 대해서 안부를 묻는 일도
간밤 산을 내려와 닭 한 마리 못 물고 간 족제비의 허리
그 쓸쓸히 휘었다 펴지는 시간의 굴곡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일도
한 가지로, 선득한 빈방의 윗목 같을 때, 매양 그러기만 할 때,
눈은 내려 푹푹 쌓이고 쌓이다 쌓이다 나도 당신의 기별도 마침내
하얘지고 그만 지치고 지치다 지치다 봄은 또 어질어질 어질머리로
들판의 주름으로 와서 그 주름들 사이로 꽃은 또 가뭇없이 져 내리고 꽃처럼도
나비처럼도 아니게 아니게만 기어이 살아서 나 또한 뒤통수 그늘 키우며
눈도 못 뜰 세월 당신은 또 무슨 탁한 거울 속에서나 바람 부는가 늙고 늙는가
문득 그렇게 문득문득만 묻고 물은 적 있다 있고 있고 있고만 있다
▶ 시·낭송_ 김근 – 김근(1973~ )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등이 있다.
배달하며
당신은 낡은 거울의 먼지 얼룩쯤에서 울고 있나요. 눈도 못 뜰 세월 당신은 또 무슨 탁한 거울 속에서나 늙고 있나요.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있는 당신, 그래서 우리는 서로 등보이며 돌아누운 채 무심한 세월은 견디고 있겠지요. 낡은 거울이나 탁한 거울은 우리 기억을 되비추는 그 무엇이겠지요. 가끔 그 거울에 당신의 기별이 비치곤 하지요. 그러고 보니 헤어져 산 지 참 오래되었네요. 우리가 각자 도생하는 사이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었다 졌을까요? 바람 불고 눈 내려 푹푹 쌓이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밥 잘 먹고 잠 잘 자며, 당신, 부디 잘 살아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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