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시 영상시

묵 값은 내가 낼게/이종문

김욱진 2015. 6. 10. 09:16

이종문, 「묵 값은 내가 낼게」

 

 
 
    그해 가을 그 묵 집에서 그 귀여운 여학생이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 둘을 냠냠냠 씹어보는 양 시늉 짓다 말을 했네
 
 
    저 만약 출세를 해 제 손으로 돈을 벌면 선생님 팔짱 끼고 경포대를 한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보면서 묵을 먹을 거예요
 
 
    내 겨우 입을 벌려 아내에게 허락 받고 팔짱 낄 만반 준비 다 갖춘 지 오래인데 그녀는 졸업을 한 뒤 소식을 뚝, 끊고 있네
 
 
    도대체 그 출세란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출세를 아직도 못했나 보네 공연히 가슴이 아프네 부디 빨리 출세하게
 
 
그런데 여보게나 경포대를 도는 일에 왜 하필 그 어려운 출세를 해야 하나 출세를 못해도 묵값은 내가 낼게

 
 
 
 
▶ 시_ 이종문 – 이종문(1955~ )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밥 찾는 소리』, 『봄날도 환한 봄날』등이 있다.

 
 
▶ 낭송_ 홍서준 – 배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천년제국」, 「삼월의 눈」등에 출연.

 
 
배달하며

    묵 값이 얼마나 된다고,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 둘을 냠냠냠 씹어보는 양 시늉” 짓던 여학생은 오지 않는 걸까요? 돈 벌면 함께 팔짱 끼고 경포대를 한 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보며 묵을 먹을 거라고 약속했던 제자는 소식이 없네요. 그 여학생 제자는 몇 철을 더 기다려야 출세를 하는 걸까요. 출세를 못 했다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 여학생과 경포대를 돌고 묵을 겸상해 먹는 그 날이 오기는 올까요. 그 약속은 세월이 삼켜버려 이미 가망없는 희망이 되고 말았지요. 그 제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대체 묵 값이 얼마나 된다고! 우리는 그 작은 약속조차 못 지키며 사는 것일까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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