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외 2편)
안상학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 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 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소풍
내사 두어 평 땅을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간다
새들이 나무를 꼬깃꼬깃 접어 물고 따라나선다
벗은 이 정도면 됐지
술병을 닮은 위장 속에는 반나마 술이 찰랑이고
파이프를 닮은 허파에는 잎담배가 쟁여져 있으니
무슨 수로 달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마다할 것인가
무슨 수로 햇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저어할 것인가
해와 달이 서로의 빛으로 눈이 먼 이 길을 뒤뚱이며 간다
어느 날은 달의 뒤편에 자리를 펴고 앉아 지구 같은 것이나 생각하며
어느 날은 태양의 뒤편에 전을 펴고 누워
딸내미와 나같이나 불쌍한 어느 여인을 생각하며
조금씩 술을 비우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담배를 당긴다
그때마다 새들은 나무를 펴고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모래주머니에 챙겨 온 콩 두어 개를 꺼내 먹는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고 잊을 만하면 걸어간다
이상하리만치 사랑하는 것들과 가까이 살 수 없는 이번 생에서 나는 가끔 꿈에서나 이런 소풍을 다녀오곤 하는데 오늘도 그랬으니 한동안은 쓸쓸하지나 않은 듯 툴툴 털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발밑이라는 곳
내 발밑은 나만의 공간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서로의 발밑을 동시에 밟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 발밑은 언제나 나만의 신성불가침 지역이다
사람은 발밑을 밟으면서부터는 단독자다
여섯 살 장마철 처음 밟아 죽인 지렁이
여덟 살 여름날 뭉개버린 개미집
적어도 두 발 아래 학살까지도 책임질 줄 아는 단독자다
흘러간 전쟁 비망록에는 발밑을 빼앗긴 주검들이 많다
가마니 따위를 뒤집어쓴 시신의 삐져나온 발바닥
그들의 발밑을 유린한 무수한 발소리들은 건재한가
내가 알기로 전범들의 발밑도 오래지 않아 발바닥에서 이탈해갔다
발밑을 가진 적 없는 젖먹이와
발밑을 상실한 노인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닮았다
발밑을 잠시 버리고서야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몸짓
발밑 없이 와서 발밑과 동행하다 발밑을 잃고서야 돌아가는 인생
때가 되면 발밑에 연연하지 않아야 될 때가 한 번은 오는 법이다
누구나 발밑을 밟고 사는 동안은 우선 발밑이 안전하길 기도한다
발밑은 나눌 수도 공유할 수도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세상 누구의 발밑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많은 부분 나무들에게서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누구의 발밑도 신성불가침 성역이다
〈2015년 제15회 고산문학상 수상작〉
_심사위원 : 이시영, 김사인
(선고위원 : 이재무, 김선태)
—수상 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2014)에서
--------------
안상학 /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그대 무사한가』『안동소주』『오래된 엽서』『아배 생각』『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열린시학》2015년 가을호 발표
'♧...신춘문예,수상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 경향 신춘문예]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0) | 2016.01.02 |
---|---|
범종 소리/노중석(제16회 대구시조문학상 수상작) (0) | 2015.12.16 |
제 15회 수주문학상 당선작)서술의 방식/ 심강우 (0) | 2015.10.28 |
제30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0) | 2015.09.22 |
[스크랩] 2014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0) | 2014.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