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외 다수/정희성

김욱진 2010. 5. 25. 10:59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日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그 즈음에

해와 달을 몸받아

누리에 나신 이여

두 손 모아 비오니

천지를 운행하올 제

어느 하늘 아래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기억하소서



옹기전에서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 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는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깨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씻김

물에서 나와 산으로 쫓긴 영산

태평연월에 총맞아 죽은 영산

저승 가다 먹으려고

도토리 한 알 손에 쥐고

올 같은 풍년에 굶어 죽은 영산

가랑잎 뒤집 쓰고 산에서 죽은 영산

애면글면 살겠다고

버섯 따다 죽은 영산

칠성산 총질 끝에 쓰러져간 젊은 영산

넋이야 넋이로다 죽은 영산 죽인 영산

모두 다 우리 동포 아니시리

우리 형제 아니시리



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시를 찾아서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술꾼


겨울에도 핫옷 한 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 해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서울역 1998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 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사랑 사설(辭說)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같이야

어차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 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나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는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 수록 푸르른

풀을 밟아라.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꽃자리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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