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세계 정리.. 시인으로서 명퇴한 셈"
이윤주기자 입력 2013.01.20. 21:21 수정 2013.01.20. 21:21
잘 만든 음반은 개별 곡의 완성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곡의 순서와 노래 사이의 공백, 여운까지 치밀하게 계산된다. 디지털 음원이 해낼 수 없는 경지가 거기에 있다. 시도 마찬가지여서, 시인은 각각의 시를 개별적으로 쓰지만, 시를 모아 시집으로 묶으면 또 다른 감각이 발생한다. 시집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표제작과 시의 동선만 봐도 시인의 취향과 시집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시를 쓰고 묶고 다듬는데 있어 이성복(61)은 탁월한 시인 중 하나다. 1980년대 문학사에 사건이 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가장 아름다운 시집'으로 기억되는 <남해금산>(1986) 등 그의 시집들은 하나 같이 섬세한 서정시들을 꾸려 거대한 서사를 만드는 구조를 갖고 있다. <아, 입 없는 것들>(2003) 이후 10년 만에 출간한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발행)는 이순을 넘어선 시인의 인생을, 이제껏 내었던 시집들을 정리하는 시집이다.
17일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난 시인은 "이번 시집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조합해 내 안목과 관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라며 "(앞으로 시집을 더 출간할지 불투명하다는 점에서)일단 시인으로도 명예퇴직 한 셈"이라고 말했다. 앞서 시인은 지난해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명예 퇴직했다.
그는 시집의 서두에서 2006년 여름 경주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 갔다가 전시회 주제이자 이두문자로 쓴 신라향가의 한 구절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에 끌렸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오다, 서럽더라'라는 뜻의 이 이두문자를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맛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다(羅)'로 의역하고, 이 여섯 글자에 맞춰 시집을 구성했다.
"내 전 시집이 6권이니까, 그 시집의 특성이 조금씩 다 들어가 있다고 보면 돼죠. 1, 2부에서 일상을 가볍게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3, 4, 5부에서 본격적인 '생사성식(生死性食)'의 이야기를 펼치고, 6부는 다시 생을 맺는 이야기들이 있죠.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6부로 돼있는데 죽음으로 가는 여행이야기거든요. (이 시집도)동일한 거에요. 제목을 신라 향가에서 따왔으니 시집 입구는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출구는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로 정했죠."
절망과 서러움으로 점철된 생의 '불가능성'을 곱씹는 이성복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고 또 허허롭다. 36년 전 청년시절 썼던 시 '이별 없는 세대'부터 최근에 쓴 시 '오다, 서럽더라 4'까지 82편을 한 권에 담으며 시인은 "나란 사람은 시간을 두고도 결국 같은 방식의 발화를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말했다.
'때로 수컷 뚝지가 쫓아내도, 쫓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를 기어코 밀어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는, 혼자서 풀이 죽어 떠나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대왕문어의 밥이 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엔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시집의 한 가운데 배치된 '뚝지'는 시집 전체를 집약하고 있는 시다. 바닷물고기 뚝지를 통해 인생의 '생사성식'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이 시를 일컬어 "걔네의 아픈 사연을 기록하기 위해 쓴 시"라며 "시인의 역할은 증언자, 기록자"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시인은 자신이 인생을 견뎌내는 과정을, 그 생에 깃든 슬픔과 절망에 관한 기록을 들려준다. 그 기록이란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 바람의 어떤 딸들이/ 신음하는 어미의 자궁을 열고/ 피 묻은 나를 번쩍 들어 올릴 때/ 또 다른 딸들이 깔깔거리며/ 빛바랜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來如哀反多羅 2')에서 드러나듯 소멸하는 삶, 닳아지는 육체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시는 상처받는 것들에게 올리는 제사, 심연의 바다 같은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왜 사는가, 인생이란 뭔가, 시는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해서 나는 시를 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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