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시집보내다/오탁번

김욱진 2017. 12. 28. 16:22

        시집보내다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 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 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오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 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수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난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 줬나?

줄잡아 몇 만평도 넘을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는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헌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 『유심』(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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