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폭설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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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자가 이것도 시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시라고 답했다. 독자의 의문인 즉, 그냥 일상생활 속 이야기 한 편이 아니냐며 되물었다. 나는 ‘시란 우리네 삶을 그려내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답했다. 소설이 인생의 단면을 포착하여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이라면, 시는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핵심만을 추려내어 압축적으로 그 의미를 전해준다고. 이 시를 읽으며 ‘생활 속 이야기’라는 것을 간파한 그대는 이미 시를 이해한 것이라고.
하긴 이 시 <폭설(暴雪)>를 쓴 시인 오탁번은 동화로 데뷔하여 시인으로 등단했고,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니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를 압축하여 시로 보여주고 있을 뿐, <폭설(暴雪)>은 참 멋진 시이다. 이 시를 읽으면 정말 남도 끝 작은 마을에 가 껄적지근한 그들의 투박한 말 속에 잠기고 싶다. 그래서 종종 시창작 수강생들에게 이 시를 권한다. 때로는 이렇게 시를 쓰는 것이라고.
이 시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시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농담과 진실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폭설로 인한 마을의 고난을 때론 무겁게 때론 가볍게 뒤틀어 독자들을 웃기고 울리는 시인의 기법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라든가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이란 말 속에 시인의 여유가 보이고,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이라든가 ‘宇宙의 迷兒가 된 듯’이란 표현 속에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를 우주의 한 공간으로 그려내는 배포까지 보이지 않은가.
박제영 시인이 그랬던가. 시란 ‘좆도 아닌 것이 좆같이 사람을 울리고 좆돼버린 사람들 좆처럼 다시 서라고 웃기는 거’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시에 대한 정의가 아닌가. 오탁번이나 박제영, 역시 시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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