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괴물/최영미

김욱진 2018. 3. 25. 19:20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황해문화 2017 겨울호

 

시인 최영미(57)를 엿보는 글은 시(詩)로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는 말(言)보다는 글(文)로 세상을 사유한다. 그의 문장은 '투명하고 단단한 금속성 울림'(방민호 서울대 교수)이다. 시인 황인숙은 그를 두고 이렇게 썼다. 

"소설에서와 달리 시에서는 시인과 화자가 겹치기 일쑤다. 시인의 일상이나 몸과 마음의 형편과 동태가 작품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영미는 그걸 꺼리지 않는다. 거침없고 서슴없다. 그 대범함에는 자부심도 한몫했으리라. 자신의 명민함에 대한 자부심, 젊은 날 수많은 독자의 아이돌 시인이었던 데 대한 자부심, 내가 설핏 엿본 최영미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시인에게 '다 털어놓는 민망함'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시는,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괴물'은 위선 꼬집은 풍자시

그는 젊은 날 또래에게 '아이돌'이었다. 서른셋에 펴낸, 50만 부 넘게 팔린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배우 못지않은 셀레브리티가 됐다. 첫 시집은 86세대 운동권을 들끓게 했다. "위선 그만 떨고 공부나 하라"는 냉소로 읽혀서다. 진보 성향이 강한 문단에서 그는 평가를 올바르게 받지 못했다. 

그는 1980년 서울대 인문대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시위에 참여했다 체포돼 무기정학을 맞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던 고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고전연구회는 나중에 주사파의 산실이 된다. '강철서신' 김영환 씨가 고전연구회 2년 후배다. 그는 졸업 후 운동 조직 외곽에서 '자본론' 번역에도 참여했다.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괴물'은 풍자시다. 시인은 이따금 내놓은 풍자시를 통해 지식인의 위선과 가식, 거짓과 속임수를 꼬집어왔다. 가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돼지, 여우에 빗댄다. '여우짓' '돼지짓'을 못마땅해하는 쪽이다. '화장한 얼굴'로만 살아가는 이를 체질적으로 버거워한다.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보도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우들'(시 '정치인'),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시 '닮은꼴')이라고 차갑게 웃으면서 '얼굴에 1억짜리 미소를 바르고/ 장애 아동의 몸을 씻기며/ 향수를 뿌린 목소리로/ 고통을 말하며/ 너는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 있니?'(시 '정치인')라고 묻는다. 

풍자시 '괴물' 속에서 "이 교활한 늙은이야!"라는 외침을 들은 'En선생'은 그조차도 정곡을 찌르면서 까발리기가 어려운 '어떤 것'을 풍자라는 문학적 장치를 이용해 비틀어 묘파한 것이다. 30대 초반 겪은 상처를 5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풍자시를 통해 세상에 알렸으니 젊은 날 겪은 상처의 무게를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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