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명함/김희정

김욱진 2018. 8. 18. 08:32

                명함

                     김희정


수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갔더니
안부보다 먼저 명함을 주고받는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받기만 하다 보니 슬슬 눈치가 보인다
술잔이 돌고
집 이야기 차 이야기 투자 이야기에
추억은 어느새 구석으로 밀리고 만다


집에 돌아와 명함을 보니
어릴 적 친구들 모습 떠올랐다
찌질이었던 성철이는
부동산 투자로 이름만 대면 아는 외제차를 타고 왔다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한 순자는
아들 둘을 서울대에 보내 교육전문가를 자처했다
친구들이 라면땅을 빼앗아 먹어
눈물 콧물 짜며 선생님께 일러 바쳤던 인수는
증권으로 크게 재미를 봤다며
애널리스트 뺨치는 말솜씨를 자랑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 없이 사는 것은 나뿐이었다

변변한 명함 한 장 장만 못한 삶
인사동 골목을 걷다
누군가 "김 시인" 하며 부를 때
나 말고도 돌아보는 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장면 생각하면
내가 시인입네 하는 마음 들킨 것 같아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집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화남,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