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외 4편)/배영옥

김욱진 2018. 10. 22. 11:52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4)

   배영옥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자화상

              겨울 연못

 

풍향계 같은 발자국만 남겨놓고

새들은 다 어디로 갔나

얼음 위에 찍힌 풍향계가

저 멀리 북국(北國)을 향해 치닫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누군가 던진 돌멩이가

얼음에 박혀 있는 겨울 연못

돌멩이가 반만 박혀 있다고

물고기가 반만 놀라는 것도 아닌데

 

물속을 들쑤셔서라도 고통을 확인하고 싶어

맨발로 어두운 바닥을 헤매고 싶어

 

풍향계가 반만 돈다고

북국이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데

새들은 왜 발자국을 남겨놓고 갔을까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누군가 나를 향해 던진 돌멩이만

바닥으로 가라앉는

겨울 연못

 

이 악물고, 더 깊이 바닥으로 파고드는

돌멩이들

 

 

             사과와 함께

  

르네 마그리트의 마그네틱 사과 한 알 현관문에 붙여놓고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사과의 허락도 없이 문을 따는 사람

 

나는 이제 더 이상 과수원집 손녀가 아니고

사과도 이미 그때의 사과가 아닌데

국광, 인도, 홍옥……처럼 조금씩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

 

사과의 고통은 사과가 가장 잘 안다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럼에도 매번 피어나는 사과꽃처럼

봄이면 내 어지럼증은 하얗게 만발하곤 하지만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빨갛게 익어본 적 없는 사람

 

내가 사과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건

사과의 눈부신 자태 때문이 아니라

사과 이전과 사과 이후의 고통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할아버지도 르네 마그리트도 방문하지 않는 현관문 안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

한 알의 사과 안에서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

 

그럼에도 사과는 이미 사과꽃을 잊은 지 오래

그럼에도 나는 이미 사과를 잊은 지 오래

 

 

         수치羞恥

 

그것은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어버린다

 

예고 없이 불쑥 솟아나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달라붙어

수시로 나를 곁눈질한다

 

내가 나에게서 발견한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게 한

 

전생과 내생을 돌고 돌아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

 

나날이 어두워지는 내일처럼

 

약 먹을 때도

왼손으로 밥 먹을 때도

정리되지 않는 시구(詩句) 속을 헤맬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그

깊고

검은 빛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어

 

수치(羞恥)는 이제 나의 힘

그것마저

사랑해야겠어

 

 

  훗날의 시집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 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향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시인동네20189월호

-----------

배영옥/ 1966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1999년매일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뭇별이 총총, 여행 산문집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

2018년 지병으로 타계


'♧...참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송찬호  (0) 2018.10.25
시벌레/정일근  (0) 2018.10.24
단풍/이외수  (0) 2018.10.16
풀꽃/나태주  (0) 2018.10.15
샘물/김달진  (0) 2018.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