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도끼/안도현

김욱진 2019. 3. 9. 13:27

도끼

도현

  

도끼 한 자루를 샀다

눈썹이 잘 생긴 놈이다

 

이 놈을 마루 밑에 밀어 넣어두고 누웠더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도 드디어 도끼를 가졌노라,

세상을 명쾌하게 두 쪽으로 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살아가다 내 정수리에 번갯불 같은 도끼 날이 내려온다 해도 이제는 피하

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내 눈썹이 아프도록 행복하였다

 

장작을 패보겠다고

이튿날 새벽, 잠을 깨자마자 도끼를 찾았다

나무의 중심을 향해 내리치면 나무는 장작이 되고 장작은 불꽃이 되고 불꽃은 혀가 되고 혀는 뜨거움이 되고 뜨거움은 애욕이 되고 애욕은 고독이 되고

그리하여 고독하게 나는 장작을 패다가 가리라 싶었다

 

도끼를 다를 줄 모르는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옛적 아버지처럼 손바닥에 침을 한 입 뱉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양발을 벌린 다음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도끼를 치켜들고는

(허공으로 치켜올려진 도끼는 구름의 안부와 별들의 소풍 날짜를 잠깐 물어보았을 것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고요한 세상의 한가운데로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내 도끼는

나무의 중심을 가르지 못하였다

장작을 패는 일은 번번이 빗나가는 사랑하는 일과 같아서

독기 없는 도끼는 나처럼 비틀거렸다 


-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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