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男根)을 잘리우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속의 눈
천년의 역사에다 댕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시집 <어린 사랑에게>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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