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문정희

김욱진 2010. 12. 4. 22:37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男根)을 잘리우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속의 눈

천년의 역사에다 댕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시집 <어린 사랑에게>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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