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해설

정호승의 시경향/유성호

김욱진 2015. 12. 27. 17:21

정호승의 시경향

현대시인 집중연구 41/정호승


              ‘슬픔’의 힘 속에서 생성되는 ‘사랑’의 노래

유 성 호

(문학평론가, 서남대 교수)

                         

1. 정호승 시의 부드러운 지층(地層)

정 호승(鄭浩承) 시의 지층에는 날카로운 단층이나 깊은 굴곡의 흔적이 없다. 언제나 부드러운 언어의 무늬와 심미적인 상상력 속에서 생성되고 펼쳐지고 완성되는 그의 시는, 이제 30년 가까운 적지 않은 시력(詩歷)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최근 시집의 발문을 쓴 김정환이 정호승의 시를 두고 “단순하기는커녕, 매우 파란만장해 보”인다고 했지만, 그것은 시인의 내적 고투의 그림자까지 일일이 헤아린 정성스런 내시경적 독법의 결과일 것이고, 시의 외관에 나타나는 주제와 어조 그리고 시적 방법에 한정할 경우, 정호승의 시는 격렬한 변화보다는 완만한 곡선을 그으며 일정한 지속성을 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 호승 시세계의 주된 형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슬픔’이라는 정서와 ‘사랑’이라는 선택적 행위이다. 그의 ‘슬픔’은 격정적인 비장함이나 감정 과잉의 감상주의를 동반하지 않고 한결같이 차분하고 관조적인 성찰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당대적 발언으로보다는 오히려 인간 존재의 보편적 정서에 대한 표현으로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그 ‘슬픔’은 극복해야 할 어떤 결핍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 혹은 존재 원리로 우리를 감싸안았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것은 에로스나 아가페 같은 특정 층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개재하는 모든 친화적 정서나 행위의 총체적 표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것은 ‘증오’의 반대편에 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규율하는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이자 존재 원리로 작용한다. 이처럼 그는 ‘슬픔’과 ‘사랑’의 시인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30여 년 동안 지속해왔다.

정호승에 대해 우리가 경험한 강렬한 첫 인상은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에서였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여섯 권의 시집1)을 더 보태 이제는 만만찮은 대중적 명망과 그 나름의 독자적인 시적 메시지를 가진 중견 시인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그는 1970-80년대의 역사적 지평에 서 있는 과거적 시인이 아니라 최근에 더욱 열정적으로 시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현재적 시인이다. 이 같은 지속성과 자기갱신력이 정호승의 이미지를, 마치 그의 외관처럼, 단정하고 성실하게 만들고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이 글은 정호승 시의 이 같은 전개 과정을 일별하면서 그의 시가 우리에게 전언하는 주제와 방법의 특성을 조감하려 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 조감도의 키워드는 ‘슬픔’과 ‘사랑’이다. 그리고 그가 그 ‘슬픔’과 ‘사랑’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시의 효용론적 덕목은 ‘희망’과 ‘위안’이다.


2. 초기시 : ‘슬픔’을 통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

정 호승 초기시에 나오는 시적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슬픔’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이 특정한 계급이나 특정한 시대의 체험적 테두리를 연상시키는 이른바 민중들(가난한 사람들, 넝마주이, 구두닦이, 혼혈아, 맹인, 노동자, 동냥아치, 꼽추, 문둥이, 장돌뱅이, 머슴, 죄수, 여공, 창녀 등)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단 그의 시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가장 일반적이고 존재론적인 보편 인간으로 화한다.2) 그래서 가장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를 노래할 때조차 정호승의 시는 보편적 서정성과 낭만적 초월의 성향을 띤다. 현실 반영과 비판을 통해 현실을 치유, 교정하려는 이성적 기획을 보인 리얼리즘 시학과 정호승의 시가 근본적으로 상이한 미학적 권역에 서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맹인 부부 가수? 부분(1시집)


물 론 맹인 부부가 기다리는 ‘눈사람’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이 세상의 ‘절망’을 구원하는 어떤 상황의 감각적 표상이다. 구약의 메시아니즘을 연상시킬 정도로 간절한 이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이 곧 기다림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통해 그 절실함과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이 기다림의 행위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소외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비극성과 갈등하고 대결하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행위의 모형으로서, 정치적 알레고리에 한정되지 않는 비상한 활력을 가지고 있다(물론 당대적 효과도 아울러 띤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당대는 물론 인간 보편의 존재 조건에 대한 해석이 모두 가능한 풍부한 동심원적 상징을 거느리고 있다).

시 인은 이 작품에서 그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결국은 ‘화해’와 ‘용서’, ‘사랑’임을 노래한다. 눈 오는 추운 밤에 앞 못 보는(그래서 내면 깊이까지 볼 수 있는) 맹인 부부 가수가 부르는 노랫소리는 눈발을 뚫고 길이 되어 앞질러가 결국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는데,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의 과정을 통해 정호승은 우리 시대의 슬픔과 그 슬픔이 기다림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궁극적 희망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 파도타기?, ?눈사람?, ?출감? 등에서 줄곧 나타나는 이 같은 ‘눈사람’ 이미지는 한결같이 저차원의 알레고리를 벗어나 정호승 개인 차원의 창조적 상징이 되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사람들이 잠든 새벽 거리에/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의 형상으로, 혹은 “자신의 눈물로 온몸을 녹이며/인간의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눈사람?)의 형상으로, 혹은 “눈사람으로 서 계시다가/눈사람 녹은 물로/ 감옥의 우물 속에 깊이 흘러가”신 어머니(?출감?)의 형상으로 연쇄적으로 나타나면서 희생자, 선구자 등의 이미지를 다성적으로 띤다. 특히 자신을 녹이며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의 이미지는, 인간의 존재 근거 자체가 자신을 소멸시킨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곧 ‘삶/죽음’ ‘생성/소멸’ ‘슬픔/희망’의 뿌리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슬픔을 위하여?)이라는, 슬픔의 양가성(兩價性)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칼’의 이미지는 난폭성이나 차가움보다는 정신적 고양을 나타내는 승화의 의미를 띠는데, 그 승화의 이미지는 정호승의 시에서 종종 ‘별’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 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부분(2시집)


일반적으로 ‘빛’의 이미지는 인간 정신의 주요한 상징을 곧잘 나타낸다. 그 가운데 ‘별빛’은 상승의 이미지로서 가장 아름다운 미적 경지를 표상한다. 또한 거기에는 유한한 자기 존재와 현실에 대한 내적 초월의 원리가 담겨 있다.

시 인이 별을 보고 운명적인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할 때, 그를 엄습하는 것은 마음의 칼날을 숨긴 슬픔이다. 그러나 그가 다음 시집에서도 노래하듯이 그에게는, “분노가 있어야 사랑은 있고/희망이 있어야 노래는 있”(?저녁별?, 4시집)다. 시인이 노래하는 희망은 그래서 먼 유토피아로부터 오는 외재적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의 내적 영혼으로부터 움터오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소외된 민중에 대한 애정을 노래하더라도, 그것을 폭로나 거친 비판으로 연결하지 않고 오로지 슬픔으로 수렴하고 있는 까닭이 해명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한 시대의 삶의 양식의 표면을 그리는 풍속화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흐름을 쫓아가 그 음영까지 그려내는 음각의 그림이다. 그래서 그는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슬픔으로 가는 길?)이 되고, 그 친숙하기 그지없는 인간 조건인 슬픔 속에서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희망을 만드는 사람”(?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이 되는 것이다.

“내 가 일생을 다하여 슬퍼한 것은/아직 눈물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밤길에서?)라는 진술 또한 그러한 시인의 인식을 드러내주거니와, 그래서 그에게는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슬픔이 기쁨에게)이 생의 일차적 에너지가 되고, 그 ‘슬픔’을 통해 ‘사랑’을 일깨우는 순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3. 중기시 : 삶과 죽음의 양가성과 그 초월

정 호승에게 슬픔과 희망이 결국은 하나의 육체를 이루듯, 삶과 죽음 역시 물리적 대극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따스함과 냉혹함을 하나의 육체에 싸안고 있다.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새벽편지?)라는 시인의 고백은 기실 ‘칼을 품은 눈사람’과 함께 바로 그러한 양가성의 시적 표상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시대적 금제(禁制)와 억압(죽음)에 대한 저항과 증언보다는, 그것을 견디고 그 안에서 희망의 원리를 찾아내는 쪽으로 시의 무게중심을 둔다. 그래서 슬픔의 표층성은 희망의 심층으로, 죽음의 표층성은 삶의 심층으로 탈바꿈된다.


별 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날은 흐리고 우리들 인생은 음산하다/북풍은 어둠 속에서만 불어오고/새벽이 오기 전에 낙엽은 떨어진다/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 자여/다시 날은 흐르고 낙엽은 떨어지고/사람마다 가슴은 무덤이 되어/희망에는 혁명이/절망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인가/오늘도 이 땅에 엎드려 거리낌이 없기를/다시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눈발? 전문(4시집)


잔 뜩 흐린 날씨에 “별들은 죽고/눈발은 흩날리(고)/낙엽은 떨어진다” 이 음산한 날에, 시인은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간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서도 희망의 원리를 잃지 않는 정신, 이것이 정호승의 ‘슬픔’을 비관주의로 혹은 감상의 과잉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가장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견인력이다. 잘 관찰해보자. 그는 ‘슬픔’을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수용하는 사람이지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내 새벽 별빛으로 너를 불러보리라”(?또 하나의 조국?)에서 보이는 조국에 대한 사랑 역시 리얼리스트의 미래적 전망이라기보다는 비극적 초월의 태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시에 여기저기 나부끼는 죽음의 묘표(墓標)는 곧 슬픔을 통해 사랑에 이르는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시 살아서 죽어야 한다”(?삶?)나 “너는 나의 시체다”(?사랑?) 같은 수사적 역설이 그러한 인식과 태도를 알려주는 증거물들이다. 그러한 역설적 희망의 원리를 보여주는 시 한 편도 이 시기의 세계를 수놓고 있다.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희망은 아름답다? 중에서(3시집)


“창 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의 끝없는 희망의 원리, 그것이 곧 슬픔이고 기다림이고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다. 정호승은 그 비극성을 “별을 노래”함으로써 초월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세계 안에서 철저히 미학화한다. 그 초월과 미학의 공간에서 많은 이들은 ‘위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호승 시의 수용미학은 이러한 ‘희망과 ‘위안’의 코드로 엮여 있다.


4. 후기시 : 죽어버릴 만한 ‘사랑’의 가치 탐구

정 호승 시의 심층적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은 누차 강조되어왔다. 물론 ‘사랑’이라는 주제가 서정시의 영역에서 그리 신선하거나 충격적인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정호승은 최근 이 진부한 ‘사랑’의 가치를 자신의 온 목소리를 다해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시를 “사랑의 시학”(하응백)으로 완성시키려는 의욕을 스스럼없이 내비친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연어? 부분(5시집)


모 천 회귀하는 연어의 생리를 빌어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노래한 이 작품은 아름답고 슬프다. 슬픔 자체를 심미화하지 않고 슬픔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내다보는 정호승의 작법과 안목이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데, 주목할 것은 사람의 자취 없는 강의 상류에 알을 낳으러(그래서 죽으러) 기어오르는 연어의 마지막 생애가 사랑의 행위로 은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는 별빛은 그대로 정호승 초기시의 빛나는 별인데, 그것은 거기서 거룩한 희생제의를 치르는 연어의 사랑에 대한 증인이 되고 있다. ‘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성’, 바로 이것이 ‘슬픔’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일구려던 정호승의 시학이 마침내 다다른 윤리적인 완성으로서의 ‘사랑’의 시학이다.

그 래서 그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그리운 부석사?)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죽어버림’이 역설의 역설이라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다만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사랑, 거기에 사랑의 비의(秘儀)와 위대함과 잔혹함이 숨어 있다는 시인의 목소리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그러나 이 제목은 불가에서 흔히 일갈을 통해 깨침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법어적 형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을 가진 그의 5시집 전체를 관류하면서 슬픔과 상처와 외로움 모두를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그 래서 시인은 이 사랑의 윤리학을 통해, 자신을 가학해 들어오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죄없는 소년이다/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보다”(?달팽이?)처럼 관용과 너그러움을 갖게 된다. 이 ‘달팽이’가 시인 자신임을 물론이다. 그래서 그 사랑은 ‘미안함’도 동반한다(?미안하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가 정호승의 후기시로 올수록 “사랑의 본성과 존재원리에 대한 체득이 우주적 교감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면모”(홍용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음 시는 흥미롭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하늘의 그물? 전문(7시집)


아 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하늘의 그물’을 유일하게 통과해나가는 기러기떼의 자유로운 비상이 그려지고 있다. 그물의 구속감과 새떼의 비상이 갖는 자유로움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구속과 자유, 슬픔과 희망, 삶과 죽음을 한순간에 은유하고 있는 시인의 즉물적 상상력이 아름답게 나타난 작품이다. 어린 새끼들을 고스란히 데리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형상으로 그린 것도 새롭지만, 하늘을 ‘광장’이나 ‘마당’이 아니라 ‘그물’로 읽는 어법 또한 재미있다. 그러니 우리의 온몸은 그물로 얽혀 있는 감옥이자, 스스로 자재롭게 유영(遊泳)할 수 있는 광활한 바다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는 그에게 이번에 정지용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인데, 소품적 성격이 강하여 그의 시가 후기로 올수록 꾸준히 단형화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 국 정호승의 시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부하고 새삼스런 자각에 이르는 일관된 과정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의 시적 도정은 어쩌면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윤동주의 서시?)이라는 귀중하지만 평범한 자각에 이르는 ‘슬픔’의 자기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5. 정호승 시의 미래

서 정시에서 ‘슬픔’을 시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다. 우선 슬픔의 범람으로 인한 감상주의가 가능할 것이고, 다음은 슬픔을 역사적 원근법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비극적 위엄이나 한(恨)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슬픔 자체를 물질화 혹은 심미화하는 방법이고, 마지막으로는 슬픔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삶의 원리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희망의 변증법을 읽는 태도이다. 정호승의 시적 태도는 마지막에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감상주의나 한의 미학, 혹은 심미적 조형화와 거리가 멀다. 오직 그는 ‘슬픔’을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으로 승인하고, 그 운명을 ‘사랑’으로 위안하고 견디며 그 안에서 ‘희망’을 일구어내는 시편을 일관되게 쓰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힘겨운 ‘희망’의 경작이 독자들에게 ‘위안’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희망’과 ‘위안’의 시편이다.

정 호승 시의 대중적 친화력은 일차적으로는 공감의 폭이 넓은 주제들(슬픔, 사랑, 희망)에서 오는 것이지만, 반복률을 최대한 살리는 형태적 균제력과 균형 잡힌 호흡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지루할 정도로 그가 작법의 중심 원리로 삼고 있는 ‘반복’의 기율은 축적과 대칭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충족시키면서, 정호승 시에 다가가는 사람들의 기억의 편의와 공감의 자발성을 돕고 있다. 그리고 성서에 근원을 둔 인유나 성서적 어법의 원용(진실로, ­노라, ­노니), 그리고 이동순의 적절한 지적처럼 빈발하는 잠언풍의 의고체와 명령형(죽어버려라, 기차를 타라)의 작법 등 친숙한 어법의 실험 또한 그러한 성과에 기여하고 있다.

정 호승의 시는, 목소리로 비유하자면, 미성(美聲)에 가깝다. 그래서 슬픔을 노래할 때도 탁하거나 컬컬하지 않다. 그 미성으로 정호승은 심각한 편차를 두지 않고 주제적, 방법적 균질성을 띠면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시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전혀 변모되지 않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보기에, 그의 시는 초기시의 시적 정치학에서 후기시의 시적 존재론으로 그 지형도를 바꾸었다. 그 존재론의 기반은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윤리학적 힘이다. 그래서 이제 정호승에게 희생없는 사랑이란 없다. 그의 ‘사랑’에 인과율보다는 운명론의 색채가 강한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제 우리는 정호승 시의 미래를 예견하면서, 그의 ‘사랑’과 ‘외로움’과 ‘슬픔의 힘’이 정결한 투명성을 계속 축적해가지 말고(그 스스로 무반성적 자기반복을 자계(自戒)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의 빛나는 잠언과 인간 삶의 복합성이 구체적 사물과 삶의 과정을 통해 결합하면서 우리에게 ‘위안’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선사하기를 기대해본다.


1)'서울의 예수'(1982), '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그리고 최근에 잇따라 펴낸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를 이른다. 이 글에서는 1, 2시집을 초기시로, 2, 3, 4시집을 중기시로, 5, 6, 7시집을 후기시로 잠정적으로 분할한다. 딱히 세계를 구획 지을 수 있는 주제적, 방법적 이질성이 그 사이에 존재해서라기보다는, 시기별로 진화되는 그의 시를 조망해보려는 의도 때문에 그러한 개괄적 방법을 택한다. 인용할 때는 1시집, 2시집 등으로 지칭한다.

 

2)정호승의 시적 인물이 처음에는 민중적 전형으로 형상화되다가, 후기로 갈수록 ‘나’라는 사적 개인의 문제로 귀환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그의 초기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객관화된 시대의 전형들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인간의 슬픔을 환유하는 상관물로 끝없이 병치되고 있는 것이고, 후기시의 서정적 주체 역시 정호승 개인의 직접적 투영의 산물이 아니라, 시인의 해석이 개입된 보편적 인간 존재의 매개적 목소리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