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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미 예정된, 한순간 속의 우리들/김상환

김욱진 2015. 1. 29. 13:16

이미 예정된/한순간 속의 우리들

 

김 상 환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만, 나는 왜 시를 쓰는지 안다. (A․랭보)

 

잠시 눈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어제 저녁 붉게 노을 졌던 태양의 한때처럼

오늘 아침 초록으로 흔들리는 잎의 한때처럼 한순간이란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어서 새벽마다 물방울이 맺히는 것일까

 

물방울 같은 한순간 그 물방울만한 힘이 나뭇가지를 휘게 하는지 그때 붙잡고 싶었던 것은 네가 아닌 그 순간이었다

 

당신도 그렇게 왔다 가는 걸까 어느 순간 기척 없이 빠져나간 손바닥의 온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그늘처럼,

이미 예정된

한순간 속의 우리들

 

-<이 향 「한순간」 [시인정신] 2013년 겨울호>

 

 

세상살이 속의 아름다움이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느닷없이 다가왔다 사라져 간다. 그것은 기미를 알아챌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정약용,「游洗劍亭記」) 시인은 기미를 알아채는 사람. 알아챌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사람이다. 이향은 기미와 기척, 순간의 시인이다. 그 순간의 기척을 누구보다 예각적으로 파악한 시인은 새벽이슬에 맺힌 물방울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깨친다. 해가 뜨면 마침내 돌려주게 될 생의 한순간,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뿜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다. 물방울의 그 힘이 마침내 나뭇가지를 휘게 하고, 기실은 꽃과 열매를 맺게 한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면, 인간의 생애란 것도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법. 그러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그늘처럼, 순간은 영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예정된/한순간을 오늘도 우리는 시를 쓰며 살아간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매한가지다. 물방울이란 물방울이 아름다운 것은 찰나를 살면서도 저토록 명징하고, 모나지 않으며, 원(圓)을 모상(模像)하는 데 있다. 태양을 보고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찬란한 무지개빛을 발산함에 있다.

 

이렇게 비 내리는 밤이면 호롱불 켜진 호야네 말집이 생각난다. 다가가 반지르르한 등을 쓰다듬으면 그 선량한 눈을 내리깔고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던 검은 말과 "애들아 우리 호야네 말 좀 그만 만져라!" 하며 흙벽으로 난 방문을 열고 막써래기 담뱃대를 댓돌 위에 탁탁 털던 턱수염이 좋던 호야네 아버지도 생각난다. 날이 밝으면 호야네 말은 그 아버지와 함께 장작짐을 가득 싣고 시내로 가야 한다. 아스팔트 위에 바지런한 발굽 소리를 따각따각 찍으며.

 

-<이시영 「호야네 말」『창비』2013년 겨울호>

 

 

 시인 박용래(朴龍來)에게 「저녁눈」(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이 있다면, 이시영에게는 「호야네 말」이 있다. 후자의 경우 전통(호롱불말집담뱃대댓돌장작짐)과 문명(시내, 아스팔트)의 대비가 특징적이다. 배경 또한 눈 내리는 밤과는 달리, 비 내리는 밤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 만큼 더욱 처연하고 애틋하다.〈과거적 시간에 대한 회감의 정서〉(에밀 슈타이거)가 서정시의 본질과 속성이라면 그리움은 이 시의 주된 정서로 표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재(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리움의 대상과 부재의 근원은 물론 호야네 말이다. 호야! 하고 호명도 해 보지만 이렇다할 답은 없고, 메아리 즉 호야네 아버지 목소리(애들아 우리 호야네 말 좀 그만 만져라)만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그것은, 급기야 환청(아스팔트 위에 발굽 소리)을 불러 오기까지 한다. 말띠 해, 봄비가 내리는 밤, 우리는 또 어디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리라.

수진 스님을 만나 뵈려고

도비산 입구 수도사를 찾으니

장독대가 따로 없고

요사채 앞마당에서

늘비한 항아리들이 먼저 반기네

 

스님이 잠깐잠깐 열어봤을

저 꿀 먹은 벙어리들을 보아!

 

크고 작은 항아리들의

저마다 배부른 모양이

높고 푸른 하늘을

가득 품어 안은 때문이겠네

 

마침맞게 달마 대사가

드렁드렁 코를 골며

깊이 잠든 것이 아닌가 싶은

항아리 하나 비켜 있어

 

초저녁 보름달 같은 뚜껑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달마는 안 계시고

항아리 속이 어두운 허공이네

 

-<박만진 「어두운 허공」 『시인정신』2013년 겨울호>

 

 여기 절집을 찾는 사람이 있다. 있어야 할 사람(스님)은 간 데 없고, 화자를 반기는 건 다름 아닌 사물이다. 꿀 먹은 벙어리 항아리다. 그것은 이렇다할 격식 같은 것은 원치 않으며(장독대가 따로 없고), 말이 없다. 그런 침묵으로 높고 푸른 하늘을/가득 품어 안은 항아리는 시인이 그토록 찾던 스님이 아닐까. 허공이 아닐까. 도(道)의 체(體)에 속하는 허(虛)와 공(空)은 본시 깊고 어둡다. 부재의 현존이다. 하여 항아리는 물리적으로 비어있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텅 빈 충만함이며 카오스의 시간이다. 그 어둠의 늪과 깊이에서 잠들어 있는 항아리의 세계는 아직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로, 저만치 비켜 (서) 있다. 밝은 어둠, 아니 흰 그늘처럼 항아리의 명색(名色)은 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진면목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마음의 형상이기도 하다. 무릇 시적 발견과 삶에는 우연이 지배한다. 그 우연과 필연 사이에 다름 아닌 시적인 순간이 포착된다면, 박만진이 그런 시인이다.

 

 

이것은 하나의 통로

잎사귀마다 물고기 한 마리씩

조그만 살을 움직여

제 이름을 쓰다가

스친 얼굴

 

새의 심장을

가만히 만져보는 손

다만 만져보는 것

 

끝이 아름다운 건 없어

가장 이른 죽음을 맞는다 해도 말이지

높이의 현기증을 극복하는 것은 불안

불안으로 미래를 불러보는 일, 날마다 손을 흔들어. 그러면 노래는 끝이 없지.

세상은 온통 음악으로 가득하지. 일요일의 손길이 피처럼 몰려오지.

 

-<이승희 「나무」『시와반시』2013년 겨울호>

 

 

 나무는 길이다. 물에서 나무로 이어지는 그 길은 어느새 잎사귀마다 물고기 한 마리씩 매달고는 허공의 바다를 유영한다. 잎새의 실핏줄이 움직일 때마다 스쳐가는 물고기의 기억들. 다시 나무의 보이지 않은 손은 가지에 내려 앉은 새의 심장을/가만히 느낀다. 새는 현기(眩氣), 아니 높이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이제 벗어나야 한다. 그것으로 미래를 불러보는 일은 새의 운명. 바람에 나무가 손을 흔들면 새의 노래는 끝이 없으리라. 세상은 온통 음악으로 가득하리라. 아름다운 건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과정으로서의 느낌이다. 나무에 대한 시인의 사유와 감수성이 돋보이는 이 시는 특히 촉각을 시각으로 구현해 낸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렘브란트가 자신의 그림에 맹인을 자주 등장시킨 것과도 통한다. 촉각은 우리에게 생명은 깊이와 모양을 갖추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나무는 하나의 통로다. 천상과 지상, 현실과 환상의 매개자인 그것은 생명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불러 일으킨다. 시의 종결어미 처리 또한 주제와 의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이 시에서 일요일의 손길이 피처럼 몰려오나무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공부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내게는 집이 여러 채 있다

그중에 으뜸은

우주宇宙 한 모퉁이 분양받은 몸집

제일 꼭대기 층엔 골방 둘

그 아래층은

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거기서 숨 한번 길게 들이쉬고 내려서면

마주 보고 마음 나누는 방이 둘

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랜 똥집

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휘, 돌아보니

여태 내가 줄곧 거처한 곳은

오감五感 가득 채워진 빈방

 

그 사이

아랫목 구들 꽉 막혔다

설마, 장작불 활활 지펴대면

막힌 굴뚝 펑 뚫리겠지, 싶어

행랑채 뒤로 돌아 들어가

굴뚝 쿡쿡 들쑤시며

간신히 고개 밀어 넣고

슥, 올려다보니

방마다 주인 노릇하던 놈들

뿔뿔이 다 도망치고,

없다

 

-<김욱진 「빈집」『문학사상』2013년 12월호>

 

 

 집(방)을 모티프로 하여 신체의 장기(臟器)를 알레고리(allegory)화 한 이 시에서 우리는 문명과 자연, 세속과 초월의 문제를 떠올린다. 인간의 몸이란 본시 대자연과 우주로부터 부여받은 집인 터이어서 그 마음 또한 고요하고(숨 한번 길게 들이쉬고 내려서면), 진리와 대면하도록(마음 보고 마음 나누는) 되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빈집의 의미를 새삼 깨치게 된다. 비어있는 마음은 실상 인간과 시의 바탕이자 기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축적과 첨단 기술이 최상의 가치이자 선(善)인 양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집이란? 우주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몸은 집이다. 허나 아파트의 분양받은 몸집으로 변화된 순간, 인간의 신체와 영혼은 하나의 기능과 수단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내부란 거지반 그 기능만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들로 연결되어(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있거나, 일상의 공간들로 채워져 있다.(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랜 똥집/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세속과 초월 <사이>에는 시인(의 감각)이 거처하는 장소다.(여태 내가 줄곧 거처한 곳은/오감五感 가득 채워진 빈방) 그 사이의 존재는 이미 단단히 막힌 구둘로 인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다. 더욱 가관인 것은 방마다 주인 노릇하던 놈들/뿔뿔이 다 도망치고,/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직의 상상력과 알레고리 기법은 현실 비판의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몸과 마음의 새로운 의미, 아니 혹자(하이데거)의 말대로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함의 의미를 재삼 환기하는 계기가 된다.

 

 

만났거나 들었거나

 

천, 지, 인을 말하는

 

떠버리들의 바다에

끝없이 들썩이며 피는

 

이야기꽃의

 

씨앗

 

-<백우선 「소금」『경기PEN문학』제11집 2013.11.25.>

 

 

 바닷가 염전, 소금이 저토록 희고 곱다. 청정(淸淨)과 신성(神聖)을 상징하는 그것은, 무엇보다 태고의 물과 바다의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에 기대자면, 소금은 이야기꽃의/씨앗으로 거듭나 있다. 이야기의 근원은 물론 바다(물)로 볼 수 있다.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자 태초의 기억을 갖고 있다. 소금은 그런 바다의 빛과 물의 결정체이자 씨앗이다. 바다는 떠버리들의 바다에서 보듯이, 고요하고 잔잔한 내면의 모습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천지인(天․地․人)의 바다는 천-지와 생-사를 매개하는 근원적인 모티프로서, 그 비밀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끝없이 들썩이며, 이야기꽃처럼 피어난다. 그 피어나는 꽃의 씨앗이야말로 생명의 빛과 소금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인이란 존재는 바다의 침묵과 언어를 알아채는 자가 아닐까. 이 경우 소금은 물론 그 바다의 다른 이름이다. 백우선의 「소금」은 간결하지만, 추상화된 아름다움과 여운이 있다. 하여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다.

 

 

고양이가 소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파도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몰려오는 갯바람이 파상형이었다

풀과 나무와 솔숲의 허리가 휘었다

 

왼쪽과 오른쪽 눈이 번갈아 아팠다 나를 울리는 달과

별이 가라앉은 밤하늘이 싫었다 감꽃조차 보기 싫었다

 

닫힌 대문이나 뛰어넘을 담은 없었다

뱃머리 폐타이어와 바다를 생각하면

연밥 같은 밥그릇 속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고양이가 돌아왔다 털에 묻은 송진과 발톱의 마른 혈흔들

혓바닥이 깊게 갈라져 있었다

 

새우깡을 받아먹던 새의 유랑은 끝이 났다

항구의 배가 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바다는 깨지고

스크루에서 튀어오른 거품들이 사라졌다

 

깨진 바다 앞에서 고양이가 뒷걸음쳤다

와류였다 붉은 해가 폐선처럼 뒤집혔다

 

갈대밭에 물이 차오를 때마다 버려진 트렁크가 출렁거린다

웅크린 고양이가 하얀 물거품을 바라보고

물살과 부딪치는 햇빛이 고양이 눈빛처럼 노랗다

 

-<김명은 「출항주의보」『유심』2014년 1월호>

 

 

 기상주의보는 재해 발상 가능성이 예측될 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기상 예보를 말한다. 호우 ․ 한파 ․ 건조 ․ 태풍 주의보가 그렇다. 주의보나 경보의 기준은 그 영향을 주는 바람과 비의 양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일반적으로 파고 3.5m 정도까지는 항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속한다. 파고(波高)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사이의 어떤 긴장 관계보다는, 고양이의 상징과 의 내면 심리에 포커스가 주어져 있다.〈고양이가 소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다 ―> 고양이가 돌아오다 ―> 고양이가 뒷걸음질치다 ―> 고양이가 웅크리다〉등과 관련한 일련의 배경적 이미지는 고양이가 돌아오기 전/후로 나뉘어진다. 돌아오기 전은 몰려오는 갯바람이 파상형인데다가, 풀과 나무와 솔숲의 허리가 휘어져 있다. 그리고 나의 내면 또한 나를 울리는 달과/별이 가라앉은 밤하늘이 싫었다에서 보듯이 부정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 이집트인들은 고양이과 관련하여 신성하게 여겼던 터라, 그 영혼이 고양된 상태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가라앉은 밤하늘이란 당연 싫을 수밖에. 비록 털에 묻은 송진과 발톱의 마른 혈흔들/혓바닥이 깊게 갈라진 상태이긴 하지만, 고양이가 돌아온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져 있다. 새의 유랑이 끝이 나고 항구의 배가 숨을 나직이 내쉬며 거품 또한 사라졌다. 허나 파고가 잦아들었어도 주의 환기를 요하는 바다 앞에서 고양이는 여전히 웅크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얀 물거품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과, 햇빛 그리고 소리(물살)에 부딪치는 모습이 낯설다. 색의 대비와 향연, 그리고 주의(注意)의 긴장 속에서 시인은 태어난다.

 

 

엄마, 한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사산된 울음아

 

소경을 불러 미친 어미를 꽁꽁 묶고 복숭아 나뭇가지로 후려치면 비명소리에 도망치던 귀신아

 

엄나무 가시를 뽑을 때마다 생각나는 그리운 역병들아

 

그 흔한 봉분도 관도 없이 처형의 세월 견디고 있는 말의 침묵, 말의 형벌아

 

너 가면 나도 갈 텐데, 남긴 뼈 하나 채 수습하지 못한 청춘아

 

버려진 상엿집 똬리 튼 배암 옆에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빠져 자는 오색 만장 같은 슬픔아

 

단 한 번의 사정(射精)을 위해 백 번을 참고 참았다가 오는 새벽아

 

허공에, 넋전이 나부끼고 무쇠 식칼이 날아다니고 쌀알이 흩어진다 흰 피 풀어 씻김굿 하는 어둠아

 

환한, 밤의 자궁아

 

-<강해림 「그냥 한번 불러보는」 시집 󰡔그냥 한번 불러보는󰡕>

 

 

그냥 한번 불러보는 게 아니라 절절한 비명(悲鳴)이다. 슬픔의 심연이라도 이만한 게 있을까, 부름과 씻김굿의 언어다. 샤먼으로서 시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엄마, 한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사산된 울음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名)을 목 메이게 부르는 소리다. 그 소리들(~울음아’, ‘~귀신아’, ‘~역병들아’, ‘~형벌아’, ‘~청춘아’, ‘~슬픔아’, ‘~새벽아’, ‘~어둠아’, ‘~자궁아)은 어느 한 부면이 아니라, 시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하여 이 시는 부름에서 시작하여 부름으로 끝맺고 있다. 그런 만큼 강해림의 시에는 모름지기 무속(巫俗)의 기운이 내재해 있다. 그것이 현대시가 갖는 또 다른 심연이라면, 진정〈말은 빛의 이슬과도 같다〉(막스 피카르트). 그 말의 빛과 그림자는 말의 침묵인 동시에 말의 형벌과도 같다. 소경 앞에 선 미친 어미는 그 형벌의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빛의 이슬인 존재의 말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밤의 자궁인 새벽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경계의 시간을 말한다. 시는 그런〈경계에서 꽃이 핀다.〉그 꽃이 사랑이라면 주술적 상상력과 사랑의 시학은 강해림이 이룩해 낸 시의 성채다.

 

 

-시인정신 2014년 봄호

출처 : 시인정신
글쓴이 : 김남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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