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시집)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김완수

김욱진 2016. 6. 18. 10:57

                가출

                

 

집을 버리고 보니 모두가 집이다

 

어머니 몸에서 버림을 받았을 때 알았어야 했다

 

햇살 아래 철둑길을 따라 걷는다

 

철로에 귀를 대면 아득히 들려오는 철바퀴 소리

 

마음에 없는 생각으로 하루를 비우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티끌이 나를 스치고 간다

 

우주의 끝자락도 이제 막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에 묻은 낮달의 먼지가 부드럽다

 

집을 버리고 나니, 우주를 떠나 보내고 나니

 

이제 다시 시작이다

 

마음을 버리고 나니 몸뿐이다

 

 

 

    나는 누구의 구멍일까

    

 

서랍 속에 버려진

지난날 전화번호 수첩을 펴보다가

낯선 이름을 발견한다

무심코 넘기다가 다시 넘기며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몸, 그 어디에도 기억은 까맣고

뜯어지고 얼룩진 수첩만이 기억을 담고 있다

도대체 누구일까 백지처럼 하얗게 지워진 그,

살면서 스치고 지나는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애써 변명을 하며

다시금 수첩을 넘기며 보니

또 있고 또 있다

나도 모르는 나의 과거

이렇게 좀이 슬어 구멍투성이라니

다이얼을 돌려 누구냐고 넌지시 묻고 싶지만

무어라 할 말이 없는 구멍

내 삶의 숱한 구멍 중의 구멍

그럼 나는 누구의 구멍일까

 

 

 

                산책

             

 

마른 나뭇잎이 떨어진 길에서

추위에 떨며 그을린 나무들이 서성이고

그 나무들이 떨어뜨린 나뭇잎의 길을 따라가면

나무들이 마음 주고픈 옹달샘에 닿을 수 있나

 

오래된 돌담의 이끼들이 돌들의 말로 자라

무심코 지나는 누구에게든 등을 돌려 세워

오래된 일과 오래지 않은 일을 말할 수 있다면

돌들이 마음 주고픈 시냇가에 닿을 수 있나

 

해 짧은 새의 지저귐을 음악으로 연주하여

우리가 악의 목젓을 툭 건드려 보았을 때

새의 지저귐이 쏟아져 나와

빈 나뭇가지마다 매달린다면

새들이 마음 주고픈 하늘에 닿을 수 있나

 

우리들 마른 마음에 불을 지펴 마음마다 큰 화로가 되어

별밤에 알밤을 모아 차가운 손금을 데우는 마음으로

한량없는 바다처럼 한 몸이 되어 넘실댄다면

우리가 마음 주고픈 마음에 닿을 수 있나

 

 

 

        

   

 

노인이 밥을 먹는다

 

식당 밖 후미진 곳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혼자

밥을 먹는다

 

유리창에 비친

숟가락질이 서툰 아이는 엄마와 같이 먹고

연인들은 서로 떠 주며 밥을 먹는다

 

사람이 먹는 밥은 밥이고

개가 먹는 밥은 개밥

돼지가 먹는 밥은 돼지밥이다

 

한입, 두입

힘들게

노인이 혼자 밥을 먹는다

 

노인의 식도를 타고 흐르는

외로운 밥

휘청휘청 걸어가는

외로운 힘

 

긴 담장에 늘어진 개나리꽃이

하나씩

터지기 시작하는 봄날

 

나도 밥을 먹는다

 

 

 

        너무 멀어

 

   

나는 항상 여기에 있지

 

여기에서 나는 떠나본 적이 없지

그대들이 멀리 떠났다 다시 돌아와도

그대들이 돌아왔다 다시 떠난다 해도

 

나는 여기에서 처음부터 아프고 있지

물먹은 습자기 같은 마음으로

 

세상은 왜 이렇게 먼지

왜 나는 자꾸 멀어지는지

다들 멀어지는 지

 

멀리 있는 것들은 왜 이리 편하고 또 불편한 지

 

더듬이를 세우고

파란 하늘에 반달이 구름 옆에 구름처럼 너무 멀어

네 것 내 것도 아닌 우리 것으로 가는데

 

멀리 있는 그대들은 또 아는지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 낮달

 

 

어느 분이 저 황홀을 굴리는 것일까

한 눈도 팔지 앉고

강물에 쏠리지도 않고

구름인 듯 저 황홀에는 어느 분이 기거하고 계실까

 

휘적휘적 걷다가

저 황홀을 만났다

꼼짝없이 황홀에 갇힌 개처럼 눕고 싶어졌다

 

미친 듯이 가려운 살갗을 벗겨내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 안에도 저 황홀이 하나 둥실 떠 있다

 

 

 

      가벼운 살림

 

 

바람을 따라

서쪽 들로 나왔다

 

하늘은 내 살림을 닮아

깨끗하다

 

부귀와 명예는 진즉에 굶어서 죽고

골발 살림에 골몰하는 골몰만 남았다

 

도둑질이라도 배웠으면 조금은 나았을까

골몰

골몰

히히릿 웃음이 터져

 

바람을 따라 가며

속으로

속으로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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