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모름지기
김남주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 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 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 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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