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문장
송종규
당신이 없는 두 번째 저녁이 지나가고 있다
구겨지고 휘어지고 용솟음치는 날짜들
저녁의 문장에는 언제나 당신의 입술이 묻어 있다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전에, 사무친다고 말하기도 전에
전선(戰線)처럼 들이닥치는 거대한 안개의 대열들
도대체 우리 사이에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지
도대체 우리 사이에 천년 세월이 지나가기나 했는지
문장은 구부정해지거나 부스러지거나 편파적으로, 별빛에 파묻힌다
저기
당신이 없는 열 번째, 열두 번째 저녁이 지나가고 있다
저녁의 입구에 줄지어 늘어선 미루나무 그리고, 슬픈 입술들
—《현대시학》2016년 10월호
죽은 새를 위한 메모
당신이 내게 오는 방법과 내가 당신에게 가는 방법은
한 번도 일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전언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이 꽃봉오리처럼 터지거나
익은 사과처럼 툭 떨어질 때
비로소 당신이 당도한 걸 알아차린다
당신에게 가기 위해 나는 구름과 바람의 높이에 닿고자 했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노래보다 높은 곳에 있고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낯선 목록에 편입되어 있다
애초에 노래의 형식으로 당신에게 가고자 했던 건 내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
이를테면, 일종의 꿈이나 허구의 형식으로 당신은 존재한다
모든 결말은 결국 어디에든 도달한다 자, 이제 내가 가까스로 당신이라는 결말에 닿았다면
노래가 빠져나간 내 부리에 남은 것은 결국 침묵,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발설했고 당신은 아마
먼 별에서 맨발로 뛰어내린 빛줄기였을 것이다
오랜 단골처럼 수시로 내 몸에는
햇빛과 바람과 오래된 노래가 넘나들고 있다
—《애지》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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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규 /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198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고요한 입술』『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녹슨 방』『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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